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빠다킹 신부

2020년 7월 8일 연중 제14주간 수요일

복음 마태 10,1-7

그때에 1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를 가까이 부르시고 그들에게 더러운 영들에 대한 권한을 주시어, 그것들을 쫓아내고 병자와 허약한 이들을 모두 고쳐 주게 하셨다.
2 열두 사도의 이름은 이러하다. 
베드로라고 하는 시몬을 비롯하여 그의 동생 안드레아, 제베대오의 아들 야고보와 그의 동생 요한, 3 필립보와 바르톨로메오, 토마스와 세리 마태오,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와 타대오, 4 열혈당원 시몬, 그리고 예수님을 팔아넘긴 유다 이스카리옷이다. 
5 예수님께서 이 열두 사람을 보내시며 이렇게 분부하셨다. “다른 민족들에게 가는 길로 가지 말고, 사마리아인들의 고을에도 들어가지 마라. 6 이스라엘 집안의 길 잃은 양들에게 가라. 7 가서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하고 선포하여라.”


어떤 아기를 보게 되었습니다. 태어난 지 몇 개월 되지 않았다는데 덩치도 크고, 머리도 크고…. 아무튼 모든 점에 있어서 비슷한 또래보다 크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와~~ 우량아인데요? 아주 튼튼하네요.”라고 말했습니다. 그랬더니 옆에 있던 아이의 할머니가 말씀하십니다. 

“걱정이에요. 태어날 때부터 비만이니 어떻게 해요? 더군다나 여자아이인데…….”

요즘에는 심지어 갓난아기까지 무조건 빼빼 말라야 하나 봅니다. 그런데 제가 어렸을 때만 해도 우량아 선발대회가 있었습니다. 이 선발대회에서 1등을 한 아이의 공통점이 있습니다. 첫째, 몸무게가 많이 나가야 하고, 둘째는 머리가 커야 했습니다. 이 기준이 요즘에도 적용될까요? 아닙니다. 마르고 머리가 작아야 미남미녀로 구분되는 점을 떠올리면 불과 40년 만에 기준이 확 바뀌었음을 깨닫습니다. 

이렇게 인간의 기준은 계속 바뀝니다. 그래서 인간의 기준에 얽매일 것이 아니라, 영원히 변하지 않을 하느님 기준을 따라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따르고 있는 기준은 어떤 것일까요? 하느님의 기준은 아예 생각도 하지 않으면서, 세상의 기준만을 바라보고 있는 것이 아닐까요?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사명을 수행하시기 위해 비천하고 멸시받는 이들을 선택하십니다. 당신의 사명은 절대로 작은 것이 아닙니다. 누구나 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가장 뛰어난 능력을 갖추고 있는 사람만이 가능할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선택이 이상합니다. 어부, 세리, 열혈당원, 심지어 자신을 팔아넘길 배반자도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이들에게 놀라운 권한을 주셔서 더러운 영을 쫓아내고 병자와 허약한 이들을 모두 고쳐 줄 수 있게 하셨습니다. 

왜 이들을 선택하셨고, 놀라운 힘까지 주셨을까요? 세상의 기준으로는 별 볼 일 없지만, 주님께서 보시는 기준은 하느님의 기준이기 때문이었습니다. 인간의 부족함을 통해 오히려 하느님의 영광이 확실히 드러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능력을 뛰어넘어 주님과 함께 할 때 모든 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여전히 세상의 기준만을 바라보면서 하느님의 기준을 제외하고 있는 것이 아니었을까요? 오늘 제1독서에서 호세아 예언자는 이렇게 선포하십니다. 

“지금이 주님을 찾을 때다.”(호세 10,12)

세상의 기준을 따르는 것이 아닌, 주님의 기준을 따르는 삶. 바로 주님을 찾을 때가 지금입니다. 주님의 기준을 따르게 될 때, 불가능한 것도 가능한 일이 됩니다. 또 절망과 좌절의 부정적 상황에서도 기쁨을 간직할 수 있는 희망의 길을 발견하게 됩니다. 하느님의 영광이 부족한 내 안에서도 이루어진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당장 주님을 찾아야 하는 이유로 충분하지 않습니까?


단조롭게만 여겨지는 우리 삶의 일상은 하느님의 은혜가 숨어 있는 곳이다(카를 라너).

열두 제자. 

슬픔에서 벗어나기 위해...


건강하던 남편의 뜻밖의 죽음으로 큰 슬픔 속에 빠진 어떤 작가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 슬픔을 극복하기가 얼마나 힘든지를 깨닫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체험을 기초로 철학적, 심리학적, 정신의학적, 사회적으로 슬픔을 풀어냅니다. 이 책은 상당히 두꺼웠습니다. 

아마 예전 같으면 ‘슬픔을 뭐 이렇게 거창하게 표현하나?’라고 할 것 같습니다. 그러나 저도 어머니의 죽음을 체험하고 나니, 당연히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자신의 슬픔은 세상의 그 어떤 것으로도 대체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사회의 다양한 부분에서 슬픔의 접점을 찾으려고 합니다. 하지만 이 역시도 정답은 아닙니다. 

누구에게나 다가오는 슬픔 안에서 우리의 작고 나약함을 다시금 깨닫게 됩니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부족함 그 자체인데도 하느님의 손길을 함부로 판단했고, 마치 내가 하느님인 양 전지전능한 흉내를 내기도 했던 것 같습니다. 

자그마한(물론 남의 판단입니다. 자신의 판단은 엄청나게 클 수 있습니다) 슬픔 속에서도 헤어나지 못하는 우리입니다. 그래서 전지전능하신 하느님께 매달려야 할 것입니다. 

기를란다요의 첫 제자들을 부르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