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빠다킹 신부

2020년 7월 10일 연중 제14주간 금요일

복음 마태 10,16-23

그때에 예수님께서 사도들에게 말씀하셨다.
16 “나는 이제 양들을 이리 떼 가운데로 보내는 것처럼 너희를 보낸다. 그러므로 뱀처럼 슬기롭고 비둘기처럼 순박하게 되어라.
17 사람들을 조심하여라. 그들이 너희를 의회에 넘기고 회당에서 채찍질할 것이다. 18 또 너희는 나 때문에 총독들과 임금들 앞에 끌려가, 그들과 다른 민족들에게 증언할 것이다.
19 사람들이 너희를 넘길 때, 어떻게 말할까, 무엇을 말할까 걱정하지 마라. 너희가 무엇을 말해야 할지, 그때에 너희에게 일러 주실 것이다. 20 사실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안에서 말씀하시는 아버지의 영이시다. 
21 형제가 형제를 넘겨 죽게 하고 아버지가 자식을 그렇게 하며, 자식들도 부모를 거슬러 일어나 죽게 할 것이다. 22 그리고 너희는 내 이름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끝까지 견디는 이는 구원을 받을 것이다.
23 어떤 고을에서 너희를 박해하거든 다른 고을로 피하여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이스라엘의 고을들을 다 돌기 전에 사람의 아들이 올 것이다.”


우리 사회에서 전염병처럼 퍼지는 현상이 하나 있습니다. 바로 ‘혐오’입니다. 누군가를 또 어떤 집단을 미워하고 싫어하는 감정을 말합니다. 물론 충분히 가질 수 있는 감정입니다. 그러나 이 감정이 폭력적인 행동으로까지 나아가고 있다면 심각하게 생각해봐야 할 것입니다. 

언젠가 성지에서 어떤 아이가 친구와 대화하는 내용을 우연히 듣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극혐’이라는 단어를 쓰는 것입니다. 미워하고 싫어하는 강도가 더 심할 때, ‘극혐’이라는 단어를 쓴다고 하더군요. 아마 ‘혐오’라는 말로도 부족했나 봅니다. 

어린아이도 쓸 정도로 미워하고 싫어하는 감정에 대한 타협과 조율 없이 무조건 싫다면서 파괴적인 모습을 보이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있습니다. 그 이유도 별것 없습니다. 그냥 자기감정 표현으로 ‘극혐’이라고 말 한마디 하고는, 혐오하는 것을 타당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이런 혐오의 생각이 ‘묻지마’ 공격으로 나아갑니다. 자기중심적인 생각에서, 나와 다른 사람을 그리고 다른 집단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생각을 하는 사람이 점점 많아진다면 어떨까요? 이 세상에서 조화를 이루면서 함께 살아감은 불가능한 일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더 큰 문제는 이렇게 이기적이고 개인주의적인 생각이 하느님을 멀리하면서 함께 하지 못하게 할 것입니다. 아마 자기 뜻대로 되지 않으면 하느님을 향해서도 ‘극혐’이라고 외치지 않을까요?

“너희는 내 이름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끝까지 견디는 이는 구원을 받을 것이다.”(마태 10,22)

제자들에게 어떤 무서운 일이 닥친다 해도, 그런 것들을 이겨 낼 수 있는 더 큰 은총이 그들에게 주어질 것을 약속하십니다. 제자들이 어디서 기도하든지, 심지어 자신들이 하느님께 봉사하고 있다고 믿는 세속 권력으로부터 박해를 받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어려움의 순간에서도 주님께서는 지켜 주신다고 하시지요. 

분명히 박해의 고통은 죽음까지도 나아갈 수 있는 커다란 크기입니다. 그런 박해의 고통을 주셨다고 하느님을 혐오하면 과연 하느님의 구원을 얻을 수가 있겠습니까? 그 안에서 이끌어 주시는 하느님의 은총을 바라보면서 기쁘게 받아들이는 사람만이 구원의 열매를 맺게 될 것입니다. 

지금은 예수님 시대처럼 피의 순교는 없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 가까이 가지 못하게 하는 많은 유혹이 바로 우리의 박해자입니다. 하느님께 나아가지 못하게 하는 것을 혐오하고 반대하면서, 하느님과 함께 할 수 있는 모든 노력을 기울여야 할 것입니다. 구원의 선물이 멀리에 있지 않게 됩니다. 


사랑한다는 것은 한 사람이 그로 온전히 살게끔 하는 것이다(윌리엄 폴 영). 

끝까지 견딘 최초의 순교자 스테파노. 

뒷모습


귀가 예쁘거든 귀만 보여 주시오

눈썹이 곱거든 눈썹만 보여 주시오

입술이 탐스럽거든 입술만 보여 주시오

하다못해 담배가치 끼운
손가락이 멋지다면
그거라도 보여 주시오

보여줄 것이 정히나 없거든
보여줄 것이 생길 때까지 기다리시도
기다린 뒤에도 보여줄 것이 없거든
뒷모습을 보여 주시오

조심조심 사라져가는 그대 뒷모습을
보여주시오

나태주 시인의 ‘뒷모습’이라는 시입니다. 이 시를 통해서 ‘사랑’에 대해 생각하게 됩니다. 

이 시의 화자에게는 어떤 모습도 다 받아들이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바로 사랑하고 있는 사람만이 할 수 있는 모습입니다. 

주님께서는 이 모습으로 다가오셨고, 우리 역시 이 모습으로 살라고 명령하십니다. 

끝까지 견디는 이는 구원을 받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