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빠다킹 신부

2020년 7월 12일 연중 제15주일

복음 마태 13,1-9

1 그날 예수님께서는 집에서 나와 호숫가에 앉으셨다. 2 그러자 많은 군중이 모여들어, 예수님께서는 배에 올라앉으시고 군중은 물가에 그대로 서 있었다. 3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많은 것을 비유로 말씀해 주셨다.
“자, 씨 뿌리는 사람이 씨를 뿌리러 나갔다. 4 그가 씨를 뿌리는데 어떤 것들은 길에 떨어져 새들이 와서 먹어 버렸다. 5 어떤 것들은 흙이 많지 않은 돌밭에 떨어졌다. 흙이 깊지 않아 싹은 곧 돋아났지만, 6 해가 솟아오르자 타고 말았다. 뿌리가 없어서 말라 버린 것이다.
7 또 어떤 것들은 가시덤불 속에 떨어졌는데, 가시덤불이 자라면서 숨을 막아 버렸다.
8 그러나 어떤 것들은 좋은 땅에 떨어져 열매를 맺었는데, 어떤 것은 백 배, 어떤 것은 예순 배, 어떤 것은 서른 배가 되었다. 9 귀 있는 사람은 들어라.”


어느 학생과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있었습니다. 이 학생의 어머니가 대화를 나눴으면 해서 이루어진 자리였습니다. 도무지 의욕 없이 살아가는 아이의 변화를 위해 대화를 나눠 달라는 것이었지요. 학생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어렸을 때는 뭘 하고 싶었니?”라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의사가 되고 싶었죠.”라고 말합니다. 곧바로 “그렇다면 의사가 되기 위해 어떤 노력을 해보았니?”라고 질문을 하자, 아무런 대답을 하지 못하고 가만히 있을 뿐이었습니다. 의사가 되고 싶었지만, 의사가 되기 위한 노력을 이제까지 해본 적이 없었습니다. 

이 학생만 그럴까요? 어쩌면 모든 사람이 이런 모습을 가지고 있습니다. 되고 싶은 모습은 있지만 이를 위한 노력이 없습니다. 잘할 수 있는 실력을 갖추기를 원하지만 이를 위한 노력을 하지 않습니다. 사랑받기를 원하지만, 사랑 주기는 전혀 하지 않습니다. 

어떻게 살고 싶은가보다 더 중요한 것은 어떻게 살고 있는가가 아닐까요? 막연하게 하늘나라에 들어가고 싶다가 아니라, 그 나라에 가기 위해 어떻게 살고 있는가가 중요한 것입니다. 

오늘 주님께서는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 말씀을 전해주십니다. 이 비유 말씀을 우리의 상식으로는 이해하기 힘듭니다. 왜냐하면, 어떤 농부도 돌밭이나 가시덤불 속에 씨를 뿌리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그런 곳에 씨를 뿌리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가능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절대로 열매를 맺지 못할 것이라면 농부는 씨를 뿌리지 않을 것입니다. 따라서 열매를 맺을 수 있다고 해서 뿌린 것이라면, 농부의 잘못이 아니라 씨를 받아들이지 않는 모습이 잘못입니다. 

우리가 이 땅에 태어났다는 것은 충분히 가능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뜻을 이룰 가능성, 그래서 커다란 열매를 맺을 가능성이 있기에 이 땅에 태어난 것입니다. 하지만 많은 이가 불가능한 이유만을 찾으면서, 자신의 모습이 변경 불가능한 돌밭이고 가시덤불의 모습처럼 생각합니다. 씨를 뿌리신 주님의 잘못이 아니라, 변하지 못한 우리의 영혼이 잘못입니다. 

따라서 막연히 ‘어떻게 살고 싶다’라는 마음으로 살아서는 안 됩니다. 그보다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떠올리면서 적극적으로 내 삶을 살아야 하겠습니다. 그래야 주님의 뜻에 맞춰서 이 세상에 많은 열매를 맺을 수 있게 됩니다. 

마음이 굳은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마음이 굳은 사람은 거룩한 씨앗을 받아들이지 않고, 더러운 영들을 위해 잘 다져진 길이 됩니다. 


공기가 창문을 통해 이동하며 서로를 환기해주듯 삶의 가장 존귀한 것이 나를 통해 이동하는 것이 내가 남기는 유산이길 바란다(마크 네포). 

씨뿌리는 사람의 비유 이콘. 

불행한 사람


예전에 아는 지인들과 함께 동남아에 있는 나라를 방문한 적이 있습니다. 경제적인 여유가 없는 나라이고, 이제야 겨우 경제적인 성장을 조금씩 이루고 있는 나라입니다. 그래서인지 계속 길에서 구걸하는 사람들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가이드분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도와주면 계속해서 사람들이 다가오니까 처음부터 그냥 무시하세요.”

저를 비롯한 모든 사람이 가이드의 말을 따라서 무시했습니다. 그런데 어떤 자매님이 지갑을 열어 1달러를 건네주는 것입니다. 이분의 남편이 “가이드가 무시하고 그냥 지나가라고 했잖아.”라고 핀잔을 주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안 돼 보이는 얼굴이 계속 밟혀서 어쩔 수가 없었어요.”

도울 수 있는 여건이 되는 데도 돕지 않으니 힘들다는 것이었지요. 그런데 함께 있던 사람 모두가 불편했나 봅니다. 그래서 다음에 도움을 요구하는 사람이 나타나면 서로 나서서 조금의 도움이라도 주려고 합니다.

불행한 사람은 돈이 없고 높은 지위를 얻지 못한 사람이 아닙니다. 그보다 가슴에 따뜻한 사랑이 없는 사람이 아닐까요?

빈센트 반 고흐, '씨뿌리는 사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