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빠다킹 신부

2020년 6월 22일 연중 제12주간 월요일

복음 마태 7,1-5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1 “남을 심판하지 마라. 그래야 너희도 심판받지 않는다. 2 너희가 심판하는 그대로 너희도 심판받고, 너희가 되질하는 바로 그 되로 너희도 받을 것이다.
3 너는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면서,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4 네 눈 속에는 들보가 있는데, 어떻게 형제에게 ‘가만, 네 눈에서 티를 빼내 주겠다.’ 하고 말할 수 있느냐?
5 위선자야, 먼저 네 눈에서 들보를 빼내어라. 그래야 네가 뚜렷이 보고 형제의 눈에서 티를 빼낼 수 있을 것이다.”


“우리 아이는 책을 읽지 않아요. 책을 읽어야 올바른 가치관을 가지고 살아갈 수 있을 텐데, 책을 읽으라고 하면 놀 궁리만 한다니까요.”

아이가 잘 성장하기 바라는 부모의 안타까운 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이때 저는 “그러면 형제님은 책을 얼마나 읽으세요?”라고 묻습니다. 그러면 난처한 표정을 지으면서 “제가 바빠서요. 하지만 저도 아이 때는 많이 읽었어요.”라고 말씀하십니다. 

부모는 읽지 않으면서 자녀에게 책을 읽지 않는다고 말하면, 강요나 강압으로밖에 느껴지지 않을 것입니다. 부모가 책을 읽는 모습을 먼저 보여 주고, 때로는 같이 읽고 이에 대해 대화를 나눠간다면 어떨까요? 부모의 모범이 먼저 보일 때, 자녀들도 따릅니다. 단순히 자녀를 위한다면서 강요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할지 알고 계셨습니다. 어떻게 살아야 영원한 생명이 주어지는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지를 잘 아셨습니다. 바로 ‘사랑’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냥 말씀만 하면서 우리에게 강요했을까요? 아니었습니다. 당신이 먼저 가장 큰 사랑으로 십자가를 짊어지셨습니다. 

이 사랑 말고는 다른 판단이 들어가지 않습니다. 사랑이라는 가장 커다란 기준이 없을 때, 손쉽게 남을 판단하고 심판하게 됩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을 통해서 분명히 말씀하시지요. 

“남을 심판하지 마라. 그래야 너희도 심판받지 않는다.”

자신의 눈을 가리고 있는 들보를 빼내어야 형제의 눈에서 티를 빼내 줄 수 있는 것처럼, 자신이 하지도 않으면서 하는 섣부른 판단이 자신의 심판을 가져오게 됩니다. 

실제로 자신은 하지 않으면서 남에게만 행하지 않음을 꾸짖는 사람을 종종 봅니다. 자신이 하지 않는 것은 너무나도 많은 이유가 있기 때문이고, 남이 하지 않는 것은 성품이 못되었기 때문이라는 식으로 말합니다. 가장 중요한 사랑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 사랑을 간직하고 있는 사람은 먼저 실천할 수밖에 없습니다. 남의 실천하지 않음을 이야기하기 전에, 자신의 실천이 더 중요함을 잘 알고 있습니다. 

말만 하는 사람을 향해 예수님께서는 일찍이 ‘위선자’라고 하셨습니다. 당시의 종교지도자들을 향한 말씀이었습니다. 그들은 자신은 실천하지 않으면서 남에게만 강요하고 있었지요. 그 결과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그들은 하느님의 아드님을 십자가에 못 박고 말았습니다. 

다른 이를 향한 판단에 앞서서 우리는 먼저 사랑을 생각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 사랑이 어떤 모습인지도 떠올려야 합니다. 말만 하는 사랑인지, 아니면 실천하는 사랑인지…….

 

행복은 입맞춤과 같다. 행복을 얻기 위해서는 누군가에게 행복을 주어만 한다(디어도어 루빈).

함부로 심판하시지 않는 주님을 늘 기억하십시오. 

졸음을 쫓는 가장 좋은 방법.


컴퓨터 앞에 앉아서 작업하고 있는데 졸음이 쏟아집니다. 어떻게 하면 이 졸음을 쫓아낼 수 있을까요? 

얼마 전에 실제로 겪은 상황이었습니다. 쏟아지는 졸음을 어떻게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이 작업을 지금 반드시 해야만 하는 상황이었고요. 그래서 커피 한 잔을 타왔습니다. 커피 카페인의 힘을 빌려 보려는 것이었지요. 

다시 작업에 열중하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커피를 든 채로 저도 모르게 잠들었나 봅니다. 글쎄 커피를 키보드에 쏟아 버렸습니다. 깜짝 놀라서 키보드를 탈탈 털며 커피를 닦아냈습니다. 바로 이 순간 놀라운 일이 생겼습니다. 글쎄 잠이 싹 달아난 것입니다. 

잠에서 깨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커피를 키보드에 쏟는 것이라는 점을 발견(?)한 날이었습니다. 물론 그 뒤에 키보드 자판이 잘 눌러지지 않아서 교체할 수밖에 없었지만, 그 방법은 확실한 것 같습니다. 

우리는 종종 방법이 없다며 포기하곤 합니다. 그러나 분명히 있습니다. 물론 여기에 또 다른 아픔이 동반될 때도 있지만, 분명히 있습니다. 따라서 어떤 순간에서도 포기해서는 안 됩니다.

죽음에서도 부활이라는 희망을 보여 주신 주님이십니다. 따라서 포기하는 것은 주님의 뜻이 절대로 아닙니다. 

아름다운 성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