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빠다킹 신부

2020년 6월 24일 성 요한 세례자 탄생 대축일

복음 루카 1,57-66.80

57 엘리사벳은 해산달이 차서 아들을 낳았다. 58 이웃과 친척들은 주님께서 엘리사벳에게 큰 자비를 베푸셨다는 것을 듣고, 그와 함께 기뻐하였다.
59 여드레째 되는 날, 그들은 아기의 할례식에 갔다가 아버지의 이름을 따서 아기를 즈카르야라고 부르려 하였다.
60 그러나 아기 어머니는 “안 됩니다. 요한이라고 불러야 합니다.” 하고 말하였다.
61 그들은 “당신의 친척 가운데에는 그런 이름을 가진 이가 없습니다.” 하며, 62 그 아버지에게 아기의 이름을 무엇이라 하겠느냐고 손짓으로 물었다. 63 즈카르야는 글 쓰는 판을 달라고 하여 ‘그의 이름은 요한’이라고 썼다. 그러자 모두 놀라워하였다. 64 그때에 즈카르야는 즉시 입이 열리고 혀가 풀려 말을 하기 시작하면서 하느님을 찬미하였다.
65 그리하여 이웃이 모두 두려움에 휩싸였다. 그리고 이 모든 일이 유다의 온 산악 지방에서 화제가 되었다. 66 소문을 들은 이들은 모두 그것을 마음에 새기며, “이 아기가 대체 무엇이 될 것인가?” 하고 말하였다. 정녕 주님의 손길이 그를 보살피고 계셨던 것이다. 
80 아기는 자라면서 정신도 굳세어졌다. 그리고 그는 이스라엘 백성 앞에 나타날 때까지 광야에서 살았다.


말을 그린 두 장의 그림이 있습니다. 하나는 작은 부분까지 꼼꼼하게 색칠을 하는 등 누가 봐도 정성이 가득 담겨 있는 그림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다른 하나는 휙휙 그린 그림으로 도저히 정성이 보이지 않습니다. 그냥 장난삼아 끄적인 그림 같습니다. 그렇다면 어떤 그림이 더 잘 그렸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정성이 담겨 있어 보이는 그림은 6살짜리가 그린 것이며, 정성 없어 보이는 휙휙 그린 그림은 천재 화가라고 알려진 피카소의 선 드로잉입니다. 이렇게 말하면 사람들은 다시 바라봅니다. 어떤 그림을 다시 볼까요? 맞습니다. 피카소의 그림을 다시 보면서, 다른 시점을 찾으려고 애씁니다. 선의 움직임, 간결함 속에 드러나는 말의 모습 등을 찾습니다. 

누가 그렸냐에 따라 나의 관점이 바뀐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점을 하느님과 우리의 관계에 비추어서 생각해보았으면 합니다. 

우리는 하느님께서 만드셨습니다. 전지전능하신 하느님께서 만드셨으니 피카소의 작품에 비할 수 없이 가장 훌륭한 작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바라봐야 할까요? 다시금 바라보면서, 왜 훌륭한 작품인지를 긍정적인 모습으로 따져 물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 자신이 하느님의 작품임을 잊어버립니다. 우리는 6살 아이가 만든 작품이 절대로 아닙니다. 그래서 더 열심히 하느님의 손길을 또 하느님을 바라볼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그래야 그 가치가 새롭게 보일 것입니다. 

오늘은 성 요한 세례자 탄생 대축일입니다. 요한 세례자는 메시아의 길을 준비하는 구약성경의 마지막 예언자였습니다. 그는 철저히 주님을 준비했고, 그래서 사람들에게 회개의 세례를 주었습니다. 그의 모습을 보고서 어떤 사람은 “미쳤다.”라고도 손가락질했습니다.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났음에도 불구하고, 광야에 나가서 낙타 가죽옷을 입고 벌꿀과 메뚜기만 먹으면서 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세례자 요한이 예언자로 믿는 사람은 그의 앞에 무릎을 꿇고 세례를 받았습니다. 

즈카르야와 엘리사벳의 아들이 요한이라는 이름을 받은 것은 그 이름이 ‘하느님의 은총’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아이를 못 낳는 태에 성령께서 생기를 불어넣어 요한이 이 세상에 나올 수 있게 되었습니다. 분명히 은총입니다. 그러나 이를 보고도 손가락질하는 사람이 있었을 것입니다. ‘늙은 나이에 주책이다.’라고 말하기도 하고, ‘정말로 그들의 아이가 맞을까?’라며 의심하기도 했을 것입니다. 하느님의 은총을 볼 수가 없습니다. 

하느님의 은총을 볼 수 있는 사람은 한 번 더 바라보려고 노력하는 사람의 몫입니다. 섣부른 판단, 특히 부정적인 생각으로는 절대로 하느님의 은총을 볼 수가 없습니다. 

어떤 것도 하느님의 은총이 아닌 것이 없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지금 하느님의 은총을 보고 계십니까? 

 

우리는 언제나 타인과 연결될 방법을 찾을 수 있다(메리 파이퍼). 

세례자 요한 이콘. 

서로 주고받는 사랑.


어느 책에서 4살 된 아이의 기도를 소개하고 있었습니다. 4살이니까 깜찍하고 순수할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 기도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사랑하는 하느님. 동생을 주셔서 감사해요. 그런데 저는 동생과 실컷 놀았어요. 이제 동생을 다시 하늘나라로 데려가 주세요.”

많은 맏이가 이런 기도를 바친다고 합니다. 부모의 관심과 사랑을 받기 위해 동생이 죽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어떤 부모도 편애(약간의 편애는 있을 수도 있습니다)를 일방적으로 하지 않습니다. 단지 본인의 생각이 사랑받지 못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창세기의 카인 모습이 우리의 모습이 됩니다. 나만 특별한 사랑을 받아야 하고, 사랑을 나눠줄 수 없다는 마음이 극단적인 행동을 취하게 만듭니다. 

잘못에 대한 논쟁은 아무에게도 유익하지 않습니다. 상대방의 잘못을 붙잡고만 있어서는 안 됩니다. 따라서 이웃을 먼저 유심히 바라보고 나 자신을 재발견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사랑을 주고받는 관계로 만들 수가 있습니다. 

광야에서의 세례자 요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