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빠다킹 신부

2020년 6월 19일 지극히 거룩하신 예수 성심 대축일

복음 마태 11,25-30

25 그때에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아버지, 하늘과 땅의 주님,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드립니다. 26 그렇습니다, 아버지! 아버지의 선하신 뜻이 이렇게 이루어졌습니다.”
27 “나의 아버지께서는 모든 것을 나에게 넘겨주셨다. 그래서 아버지 외에는 아무도 아들을 알지 못한다. 또 아들 외에는, 그리고 그가 아버지를 드러내 보여 주려는 사람 외에는 아무도 아버지를 알지 못한다.
28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 29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가 안식을 얻을 것이다.
30 정녕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


바로 위의 형과 저의 나이 차이는 네 살입니다. 그러다 보니 같이 놀 일이 그렇게 많지 않았습니다. 형이 초등학교에 다니면서 학교에 들어가기 전의 저는 늘 혼자일 수밖에 없었습니다(저는 유치원을 다니지 않았습니다). 초등학교에 들어가서도 마찬가지였지요. 하교 시간의 차이로 인해서 집에 오면 늘 혼자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집 근처에 다른 집이 없어서 친구도 없었습니다. 그렇다면 많이 외로웠을까요? 

아닙니다. 혼자서도 놀 것이 너무나 많았습니다. 넓은 마당을 혼자 돌아다니며 이것저것 만지면서 놀았습니다. 집 안에서도 제 호기심을 채워주는 것이 많아서 혼자 있어도 즐거웠습니다. 

아이들은 호기심이 많습니다. “이게 뭐예요?” 하면서 묻는 것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호기심이 많으면 외로울 수 없고 그래서 매 순간 즐겁게 살 수 있습니다. 그런데 어른이 되면서 호기심을 잃어버립니다. 호기심을 일으키는 질문을 더는 하지 않으면서 그러려니 합니다. 어쩌면 호기심은 미래를 바라보는 희망이고, 기쁘게 지금을 사는 지혜가 아닐까요? 

우리의 주님께 대한 호기심은 어떤가요? 이 호기심을 가지고 주님을 알아가면서 희망을 품고 지금을 기쁘게 살 수 있습니다. 하지만 주님께 대한 호기심 없이 ‘그러려니’ 합니다. 또 ‘이럴 거야’ 하면서 자신의 틀에 주님을 가둬버리기도 합니다. 그 결과 주님을 알 수가 없습니다. 주님 안에서 희망과 기쁨도 찾지 못합니다. 어린이와 같은 이가 하늘나라를 차지할 것이라는 이유를 알 수 있습니다. 

오늘 주님께서는 하느님 아버지께 감사의 기도를 바치십니다. 그 내용에 우리는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세상 안에서 지혜롭고 슬기롭다는 평가를 받는 사람이 있습니다. 자신의 지혜와 슬기로 하느님의 선하신 뜻을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합니다. 그런 지혜는 단지 지혜처럼 보이는 것을 지녔을 뿐이라고 하시지요. 그에 반해 악에 물들지 않은 사도들을 철부지라고 표현하십니다. 나이가 어려 철부지일까요? 아닙니다. 죄와 사악함에서 철부지라는 것이었습니다. 

이렇게 악에 물들지 않는 순박한 사람들에게 당신을 알려 주심으로써 하느님의 은총을 환하게 드러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들은 주님께 대한 호기심 없이 ‘그러려니’ 하지 않으며, ‘이럴 거야’ 하면서 자신의 틀 안에 주님을 가두지 않습니다. 철저히 주님께 의지하면서 주님을 알기 위해 계속된 질문을 던집니다. 

오늘은 지극히 거룩하신 예수 성심 대축일입니다. 예수님의 거룩한 마음을 공경하며 그 마음을 본받고자 하는 날이지요. 이 마음을 본받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앞서 말씀드린 악에 물들지 않는 순박한 모습, 호기심을 갖고 주님을 알려고 노력하는 모습, 자신의 틀에 주님을 가두지 않는 모습을 통해서만이 주님 마음을 본받을 수 있습니다. 

 

인생은 겸손에 대한 오랜 수업이다(제임스 M.배리). 

지극히 거룩하신 예수 성심. 

나는 겸손하니 내게서 배워라(아우구스티누스, 설교집 중에서)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당신에게서 세상을 건설하는 법, 눈에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모든 것을 창조하는 법, 기적을 일으키고 죽은 이를 되살리는 법을 배울 것이 아니라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한 것을 배우라고 합니다. 

높이 올라가고 싶습니까? 그렇다면 밑에서부터 시작하십시오. 웅장한 건물을 세우고 싶습니까? 그렇다면 바닥에서 터부터 닦으십시오. 

이것이 겸손입니다. 아무리 웅장한 건물을 짓고 싶더라도, 크고 높은 건물을 짓고 싶을수록 터를 더 깊게 파야 합니다. 건물은 짓다 보면 높이 올라가지만, 그 건물의 기초를 세우는 사람은 먼저 아주 아래로 내려가야 합니다. 

이처럼 건물도 높이 올라가기 전에는 낮으며, 탑은 굴욕을 겪은 뒤에야 올라간다는 사실을 아시겠지요? 

아우구스티누스 성인의 말씀입니다. 성인의 말씀처럼 우리도 겸손을 간직해야 합니다. 그래야 안식을 얻을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당신의 멍에가 편하고 그 짐이 가볍다고 하셨습니다. 

오랜만에 바닷가에 다녀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