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빠다킹 신부

2021년 3월 18일 사순 제4주간 목요일

복음 요한 5,31-47

 

그때에 예수님께서 유다인들에게 말씀하셨다.
31 “내가 나 자신을 위하여 증언하면 내 증언은 유효하지 못하다. 32 그러나 나를 위하여 증언하시는 분이 따로 계시다. 나는 나를 위하여 증언하시는 그분의 증언이 유효하다는 것을 알고 있다.
33 너희가 요한에게 사람들을 보냈을 때에 그는 진리를 증언하였다. 34 나는 사람의 증언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런데도 이러한 말을 하는 것은 너희가 구원을 받게 하려는 것이다. 35 요한은 타오르며 빛을 내는 등불이었다. 너희는 한때 그 빛 속에서 즐거움을 누리려고 하였다. 36 그러나 나에게는 요한의 증언보다 더 큰 증언이 있다. 아버지께서 나에게 완수하도록 맡기신 일들이다. 그래서 내가 하고 있는 일들이 나를 위하여 증언한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셨다는 것이다. 37 그리고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도 나를 위하여 증언해 주셨다. 너희는 그분의 목소리를 들은 적이 한 번도 없고 그분의 모습을 본 적도 없다. 38 너희는 또 그분의 말씀이 너희 안에 머무르게 하지 않는다. 그분께서 보내신 이를 너희가 믿지 않기 때문이다.
39 너희는 성경에서 영원한 생명을 찾아 얻겠다는 생각으로 성경을 연구한다. 바로 그 성경이 나를 위하여 증언한다. 40 그런데도 너희는 나에게 와서 생명을 얻으려고 하지 않는다.
41 나는 사람들에게서 영광을 받지 않는다. 42 그리고 나는 너희에게 하느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없다는 것을 안다. 43 나는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왔다. 그런데도 너희는 나를 받아들이지 않는다. 다른 이가 자기 이름으로 오면, 너희는 그를 받아들일 것이다. 44 자기들끼리 영광을 주고받으면서 한 분이신 하느님에게서 받는 영광은 추구하지 않으니, 너희가 어떻게 믿을 수 있겠느냐?
45 그러나 내가 너희를 아버지께 고소하리라고 생각하지는 마라. 너희를 고소하는 이는 너희가 희망을 걸어 온 모세이다. 46 너희가 모세를 믿었더라면 나를 믿었을 것이다. 그가 나에 관하여 성경에 기록하였기 때문이다. 47 그런데 너희가 그의 글을 믿지 않는다면 나의 말을 어떻게 믿겠느냐?”

 

신학생 때 서품식 때가 되면 상당히 분주해집니다. 인천교구는 서품식 때 후배 신학생들이 전례, 성가는 물론 행사 진행 일체를 도맡아 하기 때문입니다. 특히 성가대는 성가 연습을 하느라 참 많은 시간을 쏟아부어야 합니다. 그런데 성가대를 지휘하는 음악부장 신학생은 늘 이런 말을 했던 것으로 기억됩니다. 

“다른 사람의 음에 귀 기울이세요. 자기 소리는 낮추어야 다른 사람의 소리를 들을 수 있습니다.”

자기 소리만 크게 내면 절대로 아름다운 성가를 화음에 맞춰서 부를 수가 없게 됩니다. 이는 이 세상의 삶에서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싶습니다. 서로 자기만 잘 났다며 목소리를 높인다면 멋진 조화를 이루는 삶을 살 수 없습니다. 다른 사람을 바라보고 다른 사람의 소리를 들을 수 있어야만 멋진 삶을 살 수 있습니다. 

가정에서 내 배우자의 목소리를 듣고, 내 가정 구성원의 목소리를 서로 잘 들어 주어야 화목해질 수가 있습니다. 직장에서도 동료의 목소리를 들어야 서로 도우면서 일할 수가 있습니다. 

‘하나 된다’라는 것은 우선 듣는 것이었습니다. 

주님의 말씀도 먼저 들어야 했습니다. 자기 생각과 다르다고, 자기 뜻대로 되지 않는다면서 듣지 않는다면, 주님과 함께 할 수 없는 것은 물론이고 주님에 대해서 제대로 알 수 없게 됩니다. 

 

주님의 뜻은 늘 아버지와 성령의 뜻과 일치를 이루지만, 타락한 본성을 가지고 있는 우리 인간은 자기 뜻대로만 하려고 합니다. 주님께서 하셨던 일은 아버지께서 주님을 보내셨다는 증거입니다. 그분께서 하신 일들은 다른 어느 사람도 할 수 없었던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일들은 아버지와 아들이 분리할 수 없는 하나의 본성을 지니고 계심을 입증해 줍니다.

 

이렇게 주님께서는 항상 아버지의 영광을 좇았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자신의 영광을 좇을 때가 너무 많지 않았을까요? 하느님께서 주시는 영광보다 인간이 주는 영광을 추구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보다 세상을 더 쉽게 받아들였습니다. 

이렇게 주님을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들을 향한 주님의 말씀은 명쾌했습니다. 그러나 유다인들은 여전히 주님을 믿지 못합니다. 앞서 말씀드렸듯이, 아버지께서 주시는 영광이 아니라 인간이 주는 영광만을 추구하면서 주님의 말씀을 듣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더 큰 선물을 위해 우리에게 오셨지만, 그 주님을 알아보지 못하는 우리가 아닐까요? 


사랑에 의해 행해지는 것은 언제나 선악을 초월한다(프레드리히 니체).

 

예수님 이콘.

공정함을 상징하는 눈가리개


법원에 세워져 있는 눈을 가리고 검과 저울을 들고 있는 여신의 상을 기억하십니까? 그리스-로마 신화에 나오는 정의의 여신 유스티치아(Justitia)입니다. 한 손에 있는 검은 법의 힘을 상징하고, 또 한 손에는 법의 엄격함을 상징하는 천칭이 있습니다. 그리고 또 하나 눈가리개는 중세 이후에 추가된 것이라고 합니다. 바로 법의 공정함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오래전 미국의 한 지방법원의 ‘제인스 허킨스’ 판사는 재판 때마다 눈을 하얀 헝겊으로 가렸다고 합니다. 시력에 문제가 있어서가 아니라, 사람들을 보지 않기 위해서였습니다. 원고나 피고 혹은 증인 중의 단 한 명이라도 자신이 아는 사람이 있다면 나 자신도 모르게 판결에 영향을 받을 수도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정의란 흔들리지 않는 것입니다. 정의가 개인적인 감정에 따라 좌우된다면 사회질서의 뿌리가 흔들리는 일입니다. 정의로운 사회가 될 수 없습니다. 

그 정의를 우리 각자의 일상 삶 안에서도 실천해야 하지 않을까요?

 

정의의 여신 유스티치아(Justiti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