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빠다킹 신부

2021년 4월 12일 부활 제2주간 월요일

복음 요한 3,1-8

1 바리사이 가운데 니코데모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유다인들의 최고 의회 의원이었다. 2 그 사람이 밤에 예수님께 와서 말하였다. “스승님, 저희는 스승님이 하느님에게서 오신 스승이심을 알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함께 계시지 않으면, 당신께서 일으키시는 그러한 표징들을 아무도 일으킬 수 없기 때문입니다.”
3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에게 말한다. 누구든지 위로부터 태어나지 않으면 하느님의 나라를 볼 수 없다.” 
4 니코데모가 예수님께 말하였다. “이미 늙은 사람이 어떻게 또 태어날 수 있겠습니까? 어머니 배 속에 다시 들어갔다가 태어날 수야 없지 않습니까?”
5 예수님께서 대답하셨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에게 말한다. 누구든지 물과 성령으로 태어나지 않으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 6 육에서 태어난 것은 육이고 영에서 태어난 것은 영이다. 7 ‘너희는 위로부터 태어나야 한다.’고 내가 말하였다고 놀라지 마라. 8 바람은 불고 싶은 데로 분다. 너는 그 소리를 들어도 어디에서 와 어디로 가는지 모른다. 영에서 태어난 이도 다 이와 같다.”


어느 시골 성당의 마당 한쪽에 여러 과일 나무가 있었습니다. 가을이 되면 익지도 않은 과일들을 따 먹느라 동네 아이들이 야단입니다. 골머리를 앓던 본당 신부님은 개구쟁이들의 양심에 호소하기로 마음먹고는 다음과 같은 팻말을 만들어 나무 앞에 꽂아 놓았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모든 것을 보고 계신다.”

본당 신부님은 이 글을 보고서 양심에 가책을 느껴서 따먹지 않을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다음 날 아침, 본당 신부님의 기대는 와르르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과일이 하나도 빠짐없이 사라진 것입니다. 그리고 그곳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적혀 있었습니다. 

“하느님은 자비하십니다.”

하느님은 어떤 분이실까요? 모든 것을 보고 계시는 전지전능하신 분이시며, 무한한 자비를 보여주시는 사랑 가득하신 분이십니다. 문제는 자기 입맛에 맞는 하느님만을 원하고 있을 때가 많다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을 포용하시는 하느님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다양한 모습으로 다가오십니다. 이런 다양한 모습의 하느님을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만이 나의 이웃도 받아들일 수가 있습니다. 

여러분이 받아들이는 하느님은 어떤 분입니까? 모든 부분을 받아들이는 겸손한 사람만이 하느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반대하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놀라운 기적을 보고도 믿지 않으면서 계속해서 표징을 보여달라고 요청했습니다. 바로 지도계급이었던 바리사이파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그들 중에 학식이 풍부하고 백성들의 교사 격인 랍비라는 호칭을 가졌을 뿐 아니라 유다인들의 최고 의회 의원이기도 한 니코데모는 달랐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받아들이고 있었습니다. 자기들이 생각하는 하느님만을 받아들이는 다른 종교지도자들과는 완전히 다른 모습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니코데모에게 새로 태어남에 관해 이야기하십니다. 영혼이 새로 태어나는 것은 하느님의 모습을 따라 새로이 창조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니코데모는 아직 믿음이 모자란 상태였기에, 이 새로운 태어남의 의미와 그것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를 빨리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성령께서 어떻게 물로써 당신의 힘을 행사하시는지를 설명해 주십니다. 

이스라엘의 이름난 스승이면서도, 이런 이야기는 처음 듣는 것이었습니다. 그만큼 좁은 시각으로 하느님을 봐 왔던 것입니다. 다양한 모습으로 우리에게 다가오시는 하느님을 받아들여야 새롭게 태어날 수 있습니다. 이로써 진정한 하느님의 자녀가 될 수 있습니다. 


진정한 사랑은 영원히 자신을 성장시키는 경험이다(M.스캇 팩).

 

한 밤 중에 예수님께 찾아와 대화를 나누는 니고데모

 

부자같게 사는 길


비좁은 방 한 칸에 다섯 식구가 함께 살고 있었습니다. 경제 사정이 어떻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잘 산다고 할 수 있습니까? 집에 텔레비전과 냉장고가 없습니다. 이 가정의 경제 사정은 어떻다고 할 수 있을까요? 몹시 어려운 가정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이 집에 사는 사람들은 가난하다는 생각을 전혀 하지 않습니다. 왜 그럴까요? 

40~50년 전, 어느 중산층의 가정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당시에는 이렇게 사는 사람이 상당히 많았습니다. 그래서 가난하다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현재의 시간을 넘어와 보십시오. 4~50년 전과 비교하면 너무나 많은 것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때와 비교하면 많은 것을 가지고 있는데, 더 풍요로운 지금 많은 것을 나누고 있습니까? 어쩌면 부족한 옛날에 더 많은 것을 나누지 않았습니까? 

많은 부를 가지고 있어도 부자 같지 않게 살 수도 있고, 많은 것이 없어도 부자 같게 살 수 있습니다. 바로 서로 사랑하며 사는 길만이 진정한 부자 같게 사는 길입니다.

 

예수님과 니코데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