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빠다킹 신부

2020년 7월 2일 연중 제13주간 목요일

복음 마태 9,1-8

그때에 1 예수님께서는 배에 오르시어 호수를 건너 당신께서 사시는 고을로 가셨다. 2 그런데 사람들이 어떤 중풍 병자를 평상에 뉘어 그분께 데려왔다. 예수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 병자에게 말씀하셨다. “얘야, 용기를 내어라.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3 그러자 율법 학자 몇 사람이 속으로 ‘이자가 하느님을 모독하는군.’ 하고 생각하였다.
4 예수님께서 그들의 생각을 아시고 말씀하셨다. “너희는 어찌하여 마음속에 악한 생각을 품느냐? 5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하고 말하는 것과 ‘일어나 걸어가라.’ 하고 말하는 것 가운데에서 어느 쪽이 더 쉬우냐?
6 이제 사람의 아들이 땅에서 죄를 용서하는 권한을 가지고 있음을 너희가 알게 해 주겠다.”
그런 다음 중풍 병자에게 말씀하셨다. “일어나 네 평상을 가지고 집으로 돌아가거라.” 7 그러자 그는 일어나 집으로 갔다. 8 이 일을 보고 군중은 두려워하며, 사람들에게 그러한 권한을 주신 하느님을 찬양하였다.


우리는 종종 믿음의 중요성에 대해 이야기를 합니다. 그렇다면 이 믿음은 누구의 믿음인가요? 나인가요? 아니면 가까운 내 친구인가요? 아마 대부분이 당연히 ‘나’라고 말씀하실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누구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 병자를 고쳐 주셨는지 보십시오. 

“사람들이 어떤 중풍 병자를 평상에 뉘어 그분께 데려왔다. 예수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 병자에게 말씀하셨다.”

치유를 받아야 할 당사자가 아니었습니다. 바로 옆에 있는 친구의 믿음을 보시고 치유해주셨습니다. 왜 그렇게 하셨을까요? 

몇 년 전에 아버지께서 편찮으셔서 응급실로 급하게 간 적이 있습니다. 이 응급실에서 의사 선생님은 보호자라 할 수 있는 저를 비롯한 가족에게만 이것저것 물어보셨습니다. 지금 환자의 상태가 어떤지, 왜 이렇게 되셨는지, 식사는 무엇을 하셨는지, 평상시에 지병이 있었는지…. 솔직히 저는 잘 몰라서 누님이 대답했지만, 의사는 환자인 아버지에게 물어보지 않고 보호자인 저희에게 물어봤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아버지가 이 모든 것을 대답할 여력이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평상에 누워 있는 중풍 병자의 믿음은 아주 부족해져 있는 상태였습니다. 자신의 병에만 집중하고 있으므로 주님께 대한 믿음을 두기가 힘든 것이지요. 그래서 주님께서는 옆에 있는 친구의 믿음을 보시고 치유해주신 것입니다.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즉, 치유할 이유를 만드시는 분이지, 치유하지 못할 이유를 만드시는 분이 아닙니다. 

이 치유 과정에서 꼭 필요한 과정이 있습니다. 첫째는 용기를 내는 것입니다. 스스로 갖는 용기가 중요합니다. 하느님의 자비하심에 맡길 수 있는 용기, 어떤 순간에서도 악에 굴복하지 않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둘째는 죄의 용서를 받는 것입니다. 즉, 영적인 치유가 먼저 이루어져야 합니다. 이를 통해서만 언제나 나와 함께 하시는 주님을 체험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을 한 뒤에 건강을 회복할 수 있음을 오늘 복음은 보여줍니다. 

“얘야, 용기를 내어라.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마태 9,2) 그 뒤에 일어나 집으로 갈 수 있었습니다. 

진정한 치유가 이루어질 수 있도록 해주시는 주님이십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첫 번째 행동이 분명해집니다. 먼저 용기를 내어야 합니다. 세상의 죄악을 두려워하고 겁낼 필요가 없습니다. 할 수 없는 이유를 만들어 뒤로 숨으려고 해서도 안 됩니다. 어떻게든 우리와 함께하면서 우리를 치유해주시려는 사랑 가득한 분이시기에, 우리의 용기로 충분히 세상의 악을 물리치고 참 행복의 삶을 살 수 있게 됩니다. 

 

작은 변화가 일어날 때 진정한 삶을 살게 된다(레프 톨스토이).

중풍 병자를 주님께 데려오다. 

내 주름까지 사랑하기.


어느 사진작가가 중견 여배우의 사진을 찍게 되었습니다. 평소에 너무나 좋아하는 여배우의 사진을 찍을 수 있다는 사실에 기뻤지만, 한편으로는 혹시 자신이 찍은 사진이 여배우에게 누가 되지는 않겠냐는 걱정도 함께 했습니다. 그래서 더욱더 최선을 다해 촬영했습니다. 

사진 촬영 후 여배우에게 자신이 찍은 사진을 보여주었습니다. 사진을 한 장씩 한참 동안 바라보던 여배우가 이렇게 말합니다. 

“이제 제 얼굴에도 주름이 가득 보이네요.”

사진작가는 이 주름이 마음에 안 드는 것으로 생각해서, “그건 걱정하지 마십시오. 이 주름을 깨끗이 수정하겠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여배우는 깜짝 놀라 말합니다. 

“아뇨, 수정하지 마세요. 저는 제가 가장 아끼는 지금의 얼굴을 얻는 데 평생 걸렸거든요.”

자신의 주름까지 사랑하는 사람이야말로 지금의 나를 온전하게 사랑하는 사람이 아닐까요? 내 몸인데 부정해봐야 어떻게 하겠습니까? 인정해야 사랑할 수 있습니다. 

주님과 중풍병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