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빠다킹 신부

2020년 7월 17일 연중 제15주간 금요일

복음 마태 12,1-8

1 그때에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밀밭 사이를 지나가시게 되었다. 그런데 그분의 제자들이 배가 고파서, 밀 이삭을 뜯어 먹기 시작하였다.
2 바리사이들이 그것을 보고 예수님께 말하였다. “보십시오, 선생님의 제자들이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3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다윗과 그 일행이 배가 고팠을 때, 다윗이 어떻게 하였는지 너희는 읽어 본 적이 없느냐? 4 그가 하느님의 집에 들어가, 사제가 아니면 그도 그의 일행도 먹어서는 안 되는 제사 빵을 먹지 않았느냐?
5 또 안식일에 사제들이 성전에서 안식일을 어겨도 죄가 되지 않는다는 것을 율법에서 읽어 본 적이 없느냐? 6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성전보다 더 큰 이가 여기에 있다.
7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 제물이 아니라 자비다.’ 하신 말씀이 무슨 뜻인지 너희가 알았더라면, 죄 없는 이들을 단죄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8 사실 사람의 아들은 안식일의 주인이다.”


의학의 아버지’라고 하면 떠올려지는 사람이 있지 않습니까? 의사 윤리 등에 대한 ‘히포크라테스 선서’의 주인공, 히포크라테스입니다. 따라서 사람들은 히포크라테스가 상당히 윤리적이며 이성적인 사람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당시 그가 가지고 있던 생각을 지금 이야기한다면 아마 사회적으로 커다란 혼란을 불러일으켰을 것입니다. 그의 윤리성에 큰 문제가 있다면서 말이지요. 

그가 했던 여성 비하의 말이 문제였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여자들은 움직이지 않고 앉아서 지내다 보니 몸에 분비물이 많이 생기고, 이 지저분한 분비물 찌꺼기를 몸에 담아 두었다가 생리를 통해 여러 구멍 중 하나로 배출시킨다. 그래서 월경 시기의 여성은 병을 옮기기 쉬운 지저분한 존재이다.’

어떻습니까? 지금 이 말을 했다면 커다란 난리가 날 것입니다. 하지만 당시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습니다. 여성의 참정권이 인정되지도 않았고, 미혼의 여자가 밖에 돌아다니는 것은 창녀가 하는 행동이라는 분위기가 팽배했던 시기였기 때문입니다. 

진리에 대해 생각하게 됩니다. 과거에는 진리라고 생각했던 것이 현재에는 거짓이 된 경우도 참으로 많습니다. 유일하게 변하지 않는 진리는 오직 하나, 하느님밖에 없음을 다시금 묵상하게 됩니다. 

안식일에 대한 논쟁이 일어납니다. 안식일은, 창조주이신 하느님께서 일하신 뒤에 쉬셨으므로 우리도 쉬어야 한다는 사실을 일깨워주기 위해 세워졌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제자들이 안식일에 일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밀 이삭을 뜯어 먹는 모습이 일하는 것으로 판단합니다. 밀 이삭을 뜯는 것은 ‘추수’이고, 뜯은 밀 이삭을 비벼서 겨를 날려버리는 것을 ‘타작’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합당한 이유 없이는 율법을 어긴 일이 없으시며 언제나 합리적인 설명을 하셨습니다. 안식일에 밀 이삭을 뜯는 행위도 결코 죄가 아니라고 단호히 말씀하십니다. 즉, 안식일 법 자체보다 안식일의 본뜻인 하느님의 사랑을 기억할 것을 명령하십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안식일의 주인이 되실 수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본뜻인 사랑에 기준을 맞추는 것이 참 진리입니다. 결코, 세세한 안식일 규정이 진리가 될 수 없습니다. 억압과 규제를 위해서 안식일을 만드신 것이 아니라, 진정한 사랑의 실천으로 안식일을 우리를 위해서 제정하셨다는 것이 영원히 변하지 않는 진리가 됩니다.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 제물이 아니라, 자비다.’라는 말씀에 집중할 수 있어야 합니다. 단순히 주님께 무엇을 드린다는 의미가 아니라, 주님의 사랑을 기억하면서 우리도 자비로운 사랑의 실천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가장 안식일 법을 충실하게 지키는 유일한 방법이 됩니다. 


문제는 모르는 것 때문이 아니라, 모르면서도 안다고 믿는데서 생긴다(윌 로저스).

안식일의 주인이신 주님. 

어렵고 힘든 말.


평소와 마찬가지로 책을 읽었습니다. 그런데 읽고 있는 이 책의 내용이 그렇게 와닿지를 않습니다. 

사실 이 책에 대한 기대감이 상당히 컸습니다. 슬픔을 어떻게 위로할지를 말하는 책으로, 어머니를 잃은 슬픔 속에 있는 제게 필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이 책 내용이 잘 받아들여지지 않는 것입니다. 만약 평소에 이 책을 읽었다면 큰 감동과 함께 사람들에게 도움이 될 내용을 계속해서 메모했을 것 같습니다. 

저자가 말하는 슬픔과 제가 간직하는 슬픔의 차이가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집중하기가 쉽지 않았던 것입니다. 

슬픔을 안고 저를 찾아온 분에게 해드렸던 말들이 얼마나 공허했을까 싶었습니다. 부끄럽고 죄송스러웠습니다. 그 다양한 슬픔을 어떻게 위로할 수 있을까요? 불가능합니다. 그냥 안아만 줄 뿐입니다. 

남에 관한 이야기는 참 쉽게 합니다. 그러나 자기 이야기가 되면 힘든 이야기가 되고 맙니다. 그래서 함부로 판단해서는 안 됩니다. 아픔은 안아줄 뿐이고, 기쁨은 함께 나누는 것뿐입니다. 

안식일 논쟁을 묵상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