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빠다킹 신부

2020년 4월 13일 부활 팔일 축제 월요일

복음 마태 28,8-15

그때에 8 여자들은 두려워하면서도 크게 기뻐하며 서둘러 무덤을 떠나, 제자들에게 소식을 전하러 달려갔다.
9 그런데 갑자기 예수님께서 마주 오시면서 그 여자들에게 “평안하냐?” 하고 말씀하셨다. 그들은 다가가 엎드려 그분의 발을 붙잡고 절하였다. 10 그때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두려워하지 마라. 가서 내 형제들에게 갈릴래아로 가라고 전하여라. 그들은 거기에서 나를 보게 될 것이다.”
11 여자들이 돌아가는 동안에 경비병 몇 사람이 도성 안으로 가서, 일어난 일을 모두 수석 사제들에게 알렸다. 12 수석 사제들은 원로들과 함께 모여 의논한 끝에 군사들에게 많은 돈을 주면서 13 말하였다. “‘예수의 제자들이 밤중에 와서 우리가 잠든 사이에 시체를 훔쳐 갔다.’ 하여라. 14 이 소식이 총독의 귀에 들어가더라도, 우리가 그를 설득하여 너희가 걱정할 필요가 없게 해 주겠다.” 15 경비병들은 돈을 받고 시킨 대로 하였다. 그리하여 이 말이 오늘날까지도 유다인들 사이에 퍼져 있다.


사람 사이의 관계와 거리를 인류학자 에드워드 홀은 ‘개체공간’이라는 개념으로 설명했습니다. 모든 개체는 자신의 주변에 일정한 공간이 필요하고, 다른 개체가 그 안에 들어오면 긴장과 위협을 느낀다는 것입니다. 가족과는 20cm, 친구와는 46cm, 회사 동료와는 1.2m 정도의 거리가 있을 때 안정감을 느낀다고 말합니다. 여기에는 단지 물리적 거리만 말하는 것이 아니라, 정신적인 거리도 포함됩니다. 아무리 친한 사이, 사랑하는 사이라도 적절한 거리가 필요합니다. 가까운 사이라고 해서 함부로 그 거리를 침범해서는 안 됩니다. 

지금 우리의 관계를 생각해보면 이 이론으로 이해할 수 있게 됩니다. 사실 가까운 관계라는 이유로 상대방의 영역에 침범하는 것을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할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이런 공격들이 쌓이고 쌓여서 의도적으로 더욱더 멀리하게 되고, 때로는 가까운 사이에서 원수의 관계로 바뀌게도 됩니다. 

적당한 거리를 지켜주는 것이 상대방을 인정하고 사랑하는 행동입니다. 이때 서로를 더욱 아낄 수가 있으며, 그 관계가 좋은 모습으로 성장할 수가 있습니다. 

주님께서도 이 거리를 지켜주셨습니다. 먼저 무덤을 찾아온 여인들에게는 천사를 보내셔서 당신이 부활하셨음을 알립니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소식을 전하러 달려가는 중에 부활한 당신의 모습을 직접 보여 주셨습니다. 그러자 여인들은 다가가 엎드려 그분의 발을 붙잡고 절합니다. 거리가 좁혀진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님께서는 거리를 지켜주시면서 우리가 당신 곁으로 가까이 올 수 있도록 하십니다. 그리고 여인들에게 제자들에게 갈릴래아로 가라고 전하게 하십니다. 제자들과의 거리도 좁히기 위해서는 아직 직접 만나야 할 때가 아니었던 것입니다. 

우리의 사랑과 믿음의 크기에 따라 주님께서는 늘 거리를 두십니다. 이 거리를 좁히기 위해서는 우리의 사랑이 커야 하고, 또 주님께 대한 믿음이 굳건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주님께서 직접 그 거리를 좁혀주시기만을 원합니다. 문제는 그 거리를 좁히려는 이유가 다른 곳에 있다는 것입니다. 내가 원하는 것을 채워주시는 주님, 나의 욕심과 이기심을 채우는 도구로서만 주님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이를 통해서는 진정으로 주님과의 거리가 좁혀질 수가 없습니다. 오히려 주님과의 거리가 더욱더 멀어질 뿐입니다. 

주님과의 거리를 좁힐 수 있도록 더 많은 사랑을 실천해야 합니다. 그리고 사랑 그 자체이신 주님께 대한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도 무덤을 찾아온 여인처럼 그분의 발을 붙잡고 절할 수 있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 시야의 한계를 곧 세상의 한계로 받아들인다. 이게 바로 지성의 오류다(아르투어 쇼펜하우어). 

 

부활의 아침

가장 현명한 사람.


야구 보는 것을 좋아합니다. 물론 점수가 좀처럼 나지 않는 투수전이 재미없는 것은 아니지만, 홈런도 많이 치고 안타도 많이 치는 타격전에 더 큰 재미를 가집니다. 그래서 투수보다 타자가 더 좋습니다. 

우연히 높은 타율을 자랑하는 타자들에게 공통점이 있다는 어느 연구 발표를 보게 되었습니다. 바로 날아오는 공을 최대한 오래 바라보며 배트를 최대한 늦게 휘두른다는 것입니다. 공이 포수 미트에 들어가는 순간까지 기다릴 줄 알아야 투구가 어디로 오는지 정확하게 판단해서 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더 빨리, 더 많이”를 외치는 세상처럼 보입니다. 그래야 더 현명하고 더 능력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조금 느리더라도, 조금 적더라도 정확한 판단이 필요하지 않을까요? 

세상의 속도에 맞추는 것보다 주님께 맞추는 사람만이 가장 현명한 사람입니다.

 

예수님 부활의 목격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