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빠다킹 신부

2020년 6월 8일 연중 제10주간 월요일

복음 마태 5,1-12ㄴ

그때에 1 예수님께서는 군중을 보시고 산으로 오르셨다. 그분께서 자리에 앉으시자 제자들이 그분께 다가왔다. 2 예수님께서 입을 여시어 그들을 이렇게 가르치셨다.
3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4 행복하여라, 슬퍼하는 사람들! 그들은 위로를 받을 것이다.
5 행복하여라, 온유한 사람들! 그들은 땅을 차지할 것이다.
6 행복하여라, 의로움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들! 그들은 흡족해질 것이다.
7 행복하여라, 자비로운 사람들! 그들은 자비를 입을 것이다.
8 행복하여라,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을 볼 것이다.
9 행복하여라,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의 자녀라 불릴 것이다.
10 행복하여라, 의로움 때문에 박해를 받는 사람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11 사람들이 나 때문에 너희를 모욕하고 박해하며, 너희를 거슬러 거짓으로 온갖 사악한 말을 하면, 너희는 행복하다! 12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너희가 하늘에서 받을 상이 크다. 사실 너희에 앞서 예언자들도 그렇게 박해를 받았다.”




영화를 잘 보지 않아서 극장을 간 지도 꽤 된 것 같습니다. 그러나 중고등학생 시절 때만 해도 극장을 수시로 찾았습니다. 학생이라 돈이 없는 관계로 개봉관이 아닌, 영화 한 편 보는 가격에 두세 편을 볼 수 있는 극장에 가서 온종일 영화를 본 적도 많았지요. 또 지금처럼 좌석제가 아니었기에 똑같은 영화를 2~3번 본 적도 있었습니다. 이렇게 영화를 좋아했던 저였습니다. 

당시 왜 그렇게 영화에 빠졌을까 생각해보면 재미도 있었지만, 무엇보다 극장에 붙은 영화 대형 그림판 때문이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호기심이 왕성했던 시절, 이 그림판은 ‘꼭 보고 싶다’라는 마음을 갖게끔 했기 때문입니다. 

이제는 어디를 가도 이 대형 그림판을 볼 수 없습니다. 또 당시처럼 인기 있어 화제가 된 영화를 보기 위해 길게 줄을 설 필요 없이 예약만 하면 편하게 그 시간에 맞춰서 영화를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그 당시가 그리워지는 것은 왜일까요? 분명히 지금보다 불편했던 환경이었는데 말입니다. 

불편했던 기억도 시간의 흐름 속에서 그리움의 시간이 될 수 있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이는 고통과 시련 역시 무조건 나쁜 것만은 아니라는 진실을 우리에게 전해줍니다. 이런 기억 역시 우리에게 행복을 가져다줄 수 있는 충분한 이유가 될 수 있다는 것이지요. 

지금 어렵고 힘든 상황이 행복하지 않은 상황이라고 단정 지을 수 없습니다. 또 내가 원하는 대로 흐르지 않는다고 해서 이 역시 행복하지 않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행복이라는 것은 세상의 관점을 뛰어넘는 것이 분명합니다.

오늘 주님께서는 산 위에서 사람들에게 ‘행복선언’을 발표하십니다. 이 행복선언의 첫 마디는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이 행복하다는 것이었습니다. 세상의 부를 경멸하고 하느님 안에서 부유하게 된 이가 하늘 나라를 차지하게 될 것이라는 말씀이었습니다. 

이렇게 시작하는 행복선언은 우리 세상에서의 관점을 완전히 뒤바꿔 놓습니다. 물질적이고 세속적인 것이 최고라고 생각이 잘못되었음을, 대신 하늘 나라를 차지할 수 있는 말과 행동을 해야 한다는 것을 깨닫게 해 줍니다. 

이를 믿는 사람은 영광스러운 보상을 생각하면서 세상의 어떤 고통이라도 견뎌낼 준비가 늘 되어 있습니다. 하늘에 있는 것을 누리기 바라는 이는 땅에서 받는 비난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지금 세상의 관점으로 볼 때 불행하다면서 불평불만을 던질 것이 아니라, 지금 내가 하는 말과 행동이 하늘 나라의 영광에 부합한 지를 먼저 떠올려야 합니다. 

사람들은 모두 행복해지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순간의 행복이 아닌 영원한 행복, 순간의 만족이 아닌 영원한 만족을 이룰 수 있는 길을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제시하십니다. 이 행복을 나의 것으로 만들어 영원한 만족을 이룰 수 있도록 주님 뜻에 맞게 살아가야 합니다. 

 

인생에서 얻을 수 있는 가장 좋은 것들은 종종 일상의 많은 부분을 바쳐서라도 피하려고 노력했던 변화에서 온다(앤절링 밀러).

행복선언 성당. 

편애


자식 중에 특별히 더 애착이 가는 아이가 있다는 어느 형제님의 말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그래서인지 자신도 모르게 편애하고 있음을 발견하고 깜짝 놀란다는 것입니다. 물론 똑같이 대하겠다는 마음을 가지고는 있지만, 생각처럼 쉽지 않다고 하십니다. 

이런 노력이 매우 중요합니다. 실제로 특별히 더 눈길이 머무는 아이가 있을 수밖에 없겠지요. 그러나 편애하지 않으려는 노력을 아예 하지 않는다면 편애를 받는 아이는 제대로 성장할 수가 없습니다. 어렸을 때 가족에 대해 부정적 인식을 하게 되면 커서 보복을 꿈꾼다고 하지 않습니까? 

심리 분석가 알베르트 괴레스는 ‘악은 잘못을 나중에 다른 사람에게 보복하는 일’이라고 말합니다. 편애라는 잘못된 행동이 나중에 가족에게 복수를 행하게 할 수도 있다는 것이지요. 

완전히 똑같은 사랑은 주기가 힘듭니다. 그러나 그러려고 노력도 하지 않는다면 분명히 큰 후회를 만들 수밖에 없습니다. 

행복을 선포하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