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빠다킹 신부

2020년 6월 10일 연중 제10주간 수요일

복음 마태 5,17-19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17 “내가 율법이나 예언서들을 폐지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마라. 폐지하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하러 왔다. 18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하늘과 땅이 없어지기 전에는, 모든 것이 이루어질 때까지 율법에서 한 자 한 획도 없어지지 않을 것이다.
19 그러므로 이 계명들 가운데에서 가장 작은 것 하나라도 어기고 또 사람들을 그렇게 가르치는 자는 하늘 나라에서 가장 작은 자라고 불릴 것이다. 그러나 스스로 지키고 또 그렇게 가르치는 이는 하늘 나라에서 큰사람이라고 불릴 것이다.”


어느 형제님으로부터 “저는 약속을 지키지 않는 사람은 절대로 믿지 않습니다.”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실제로 누구를 만나기로 했는데, 10분 정도 기다리다가 그냥 집으로 돌아왔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약속을 지키지 않는 사람은 다시 만날 필요가 없다고 선언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사면서 많은 예측을 합니다. 경제, 정치, 문화……. 그뿐만 아니라 인간관계 안에서도 얼마나 많은 것을 예측하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단 한 번 본 것을 가지고서 정확한 예측을 할 수 있을까요? 선거 때 보면 선거 전에 여론 조사를 몇 차례 합니다. 예측을 더 정확하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이처럼 단 한 번의 예측은 부정확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부정확한 예측만을 계속해서 쏟아내고 있습니다. 

자신에 대해서도 예측을 하며 말합니다. ‘너무 어려워.’, ‘안 될 거야.’, ‘못해’, ‘나는 부족해’, ‘소용없어. 그래봤자 달라지지 않을 거야.’ 등의 예측을 자신을 향해서 합니다. 그러나 이 예측이 틀렸을 경우가 더 많습니다. 텔레비전에 나오는 전문가들의 미래에 대한 예측도 50% 넘기가 쉽지 않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동전의 앞뒤를 맞추는 것보다 더 낮은 확률입니다. 이 낮은 확률을 왜 맞다고 생각하면서 단정을 짓습니까?

이런 잘못된 예측은 하느님께 대한 잘못된 예측으로 이어집니다. 하느님의 뜻을 유한한 존재인 우리가 어떻게 정확하게 알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도 마치 자신이 하느님 양 끊임없는 예측을 하면서 그것만 맞다고 단정 짓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에 대해 잘못된 예측을 하고 있습니다. 안식일에 병자를 고쳐 주시고, 죄인들과 함께 어울리는 모습을 보면서 율법이나 예언서들을 폐지하러 온 줄로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폐지하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하러 왔음을 말입니다. 

예언서와 율법의 완성은 사랑을 통해서만 가능합니다. 사랑이 예언서와 율법의 정신이고, 따라서 이 사랑을 지키지 않는 사람은 하늘 나라에서 가장 작은 자가 될 수밖에 없고, 사랑을 철저히 지키려는 사람은 하늘 나라에서 큰사람이라고 불리게 될 것입니다. 

잘못된 예측은 사랑을 잊어버리게 합니다. 실제로 예수님께 대한 잘못된 예측을 했던 사람들은 예수님께 대한 사랑을 표현할 수 없었습니다. 철저히 적대적인 모습을 취했고, 그 적대적인 모습이 후에 십자가의 죽음으로 이어지게 했습니다. 

섣부른 예측보다는 사랑이 먼저입니다. 아주 작은 사랑이라도 지키고 또 그렇게 가르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하늘 나라의 큰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모든 시련은 결국에는 축복이 되기 마련이다(리처드 바흐). 

율법이나 예언서를 완성하러 오신 주님이십니다. 

행동 자체를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종종 “그 사람은 ~한 사람이다.”라고 말합니다. 이렇게 말하는 것은 그 사람의 어떤 행동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행동만으로 그 사람을 정의하는 것은 옳지 못합니다. 즉, “저 사람은 할 일을 뒤로 미루는 사람이다.”라고 말할 것이 아니라, “저 사람은 할 일을 뒤로 미뤄요.”라고 말하는 것이 옳습니다. 그 사람은 어떤 ‘사람’이 아니라, 어떤 ‘행동’을 할 뿐이기 때문입니다. 

하루에도 몇 차례 화장실을 갑니다. 이 모습을 보고서 ‘오줌싸개’라고 할까요? 아닙니다. 단지 화장실 가는 행동을 할 뿐입니다. 이렇게 행동 자체를 바라볼 수 있을 때, 상대방을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습니다. 

주님을 반대했던 사람들은 예수님을 ‘불경한 사람’이라고 단정 지었습니다. 그때 예수님은 내 행동을 보고서 믿으라고 말씀하셨지요. 주님께서는 ‘~한 사람’이라고 단정 짓는 것은 옳지 않음을, 대신 행동 자체를 볼 수 있는 마음의 여유를 우리에게 요구하십니다. 

카르멜 산의 엘리야 예언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