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9월 7일 연중 제23주간 월요일
복음 루카 6,6-11
6 안식일에 예수님께서 회당에 들어가 가르치셨는데, 그곳에 오른손이 오그라든 사람이 있었다.
7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예수님을 고발할 구실을 찾으려고, 그분께서 안식일에 병을 고쳐 주시는지 지켜보고 있었다.
8 예수님께서 그들의 생각을 아시고 손이 오그라든 사람에게, “일어나 가운데에 서라.” 하고 이르셨다. 그가 일어나 서자 9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너희에게 묻겠다. 안식일에 좋은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 남을 해치는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
목숨을 구하는 것이 합당하냐? 죽이는 것이 합당하냐?” 10 그러고 나서 그들을 모두 둘러보시고는 그 사람에게, “손을 뻗어라.” 하고 말씀하셨다. 그가 그렇게 하자 그 손이 다시 성하여졌다.
11 그들은 골이 잔뜩 나서 예수님을 어떻게 할까 서로 의논하였다.
규칙적인 생활을 해와서 그런지 식사 때가 되면 배에서 밥 달라고 아우성을 치고, 잠잘 때가 되면 이제 얼른 자라고 눈꺼풀이 저절로 감깁니다. 식사는 아침 7시, 낮 12시 30분, 저녁 6시에 꼭 맞춰서 먹고, 잠은 밤 10시에 자서 새벽 3~4시에는 일어납니다.
이렇게 생활한 지가 벌써 20년입니다. 그러다 보니 남들은 어떻게 이렇게 시간 맞춰서 사냐고 하지만, 저에게는 시간을 맞추지 않게 되면 너무나 힘듭니다.
한 번은 친한 친구가 밤 9시에 만나자고 연락을 했습니다. 곧 잠을 자야 하는데, 벌써 졸음이 밀려오고 있는데 만나자고 하니까 화가 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친구의 목소리가 이상합니다. ‘무슨 문제가 있나?’ 싶었고, 직접 만나서 친구의 고민을 들으면서 함께 대화를 나눌 수 있었습니다. 안 만났으면 큰일이 날 뻔했다 싶을 정도로 중요한 만남이었습니다.
만약, “나는 이 시간에는 무조건 자야 해. 다른 시간에 만나자.”라고 했다면 어떠했을까요? 제가 20년째 지키고 있는 원칙이지만, 사랑이 먼저입니다. 사랑의 원칙이 먼저이기 때문에 제 개인적인 원칙은 얼마든지 깨질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은 안식일 논쟁입니다. 오른손이 오그라든 사람을 고치려는 예수님을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될 일을 하고 있다면서 고발할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자신이 세운 원칙에 벗어나는 것을 인정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악의적 해석을 꾸짖으십니다. 그래서 물으십니다.
“안식일에 좋은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 남을 해치는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 목숨을 구하는 것이 합당하냐? 죽이는 것이 합당하냐?”
율법이라는 원칙도 사랑의 원칙 앞에서는 고개를 숙여야만 했습니다. 사랑의 원칙이 항상 맨 윗자리를 차지해야 하고, 이 원칙을 따르는 데 최선을 다하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을 고발하려는 바리아시들이 이 사실을 몰랐을까요? 아닙니다. 그들 역시 이 사랑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율법 자체만을 바라보려다 보니 사랑은 잊어버린 것입니다.
우리가 반드시 지켜야 한다고 생각하는 원칙은 무엇입니까? 그 원칙이 나쁜 것은 아니지만, 사랑의 원칙이 실천되지 않는 원칙이라면 좋은 원칙이 될 수 없습니다. 사랑의 원칙을 항상 가장 윗자리에 놓아야 합니다.
편한 일에 익숙해지는 것이 가장 나쁜 것이다(라틴어 명언).
수원교구 수리산 성지입니다.
많이 벌어 많이 쓰는 삶, 아니면 적게 벌어 적게 쓰는 삶.
옛날에 어떤 책에서 읽은 구절 하나가 생각납니다.
‘인생을 사는 데는 두 가지 방법이 있다. 많이 벌어 많이 쓰는 삶, 적게 벌어 적게 쓰는 삶.’
어떤 삶이 편할까요? 당연히 적게 벌어 적게 쓰는 삶이 편할 것입니다. 나의 모든 불편은 많이 소유하는 데서 나옵니다. 없으면 없는 대로 사는 삶은 불편이 아닌 또 다른 자유를 줍니다.
제 차는 경유차로, 내년이면 노후 경유차로 분류가 되어서 도심지에 들어갈 때는 운행제한을 받게 됩니다. 고민에 빠졌습니다. 그래서 차를 알아보는데, 차 종류가 너무 많아서 어떻게 선택해야 할지를 모르겠더군요. 결국 “그냥 탄다.”라고 결론을 냈습니다. 선택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지요. 더군다나 아직 1년이 남았으니까요.
무엇을 하나 소유하려 할 때도 따지고 생각할 것이 많습니다. 그러나 소유하지 않으면 그만큼 생각할 것이 줄어드는 편안한 삶이 됩니다.
어떤 삶을 살아야 할까요?
많이 벌어 많이 쓰는 삶, 아니면 적게 벌어 적게 쓰는 삶. 당연히 후자인데도 자꾸만 전자에 눈이 가지 않나요? 우리의 욕심을 벗어던지기란 이렇게 힘듭니다.
수리산 성지의 성당 제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