빠다킹 신부

2020년 4월 5일 주님 수난 성지 주일

건들구리 2020. 4. 5. 11:35

복음 마태 26,14-27,66

마태오가 전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기입니다.

 

우리는 피해자 탓하기 오류에 종종 빠집니다. 언젠가 교통사고를 당한 적이 있습니다. 좌회전하고 있는데 옆 차선에 있던 차가 직진을 해서 제 차의 옆을 부딪친 것입니다. 사고 후 안전한 곳에 차를 세운 뒤에 사고를 낸 차의 운전자에게 다가가 “괜찮으세요?”라고 말하자, “거기서 좌회전을 하시면 어떻게 해요?”라면서 화를 내는 것입니다. 상대방 차가 서 있었던 차선은 무조건 좌회전을 해야 하는 차선이고, 제 차가 서 있었던 차선은 좌회전과 직진 모두가 가능한 차선이었습니다. 즉, 교통신호를 위반한 운전자가 오히려 전혀 위반하지 않은 저를 향해 화를 내는 것입니다. 

어이가 없었습니다. 잘못은 분명 상대방에게 있는데, ‘목소리 큰 사람이 이긴다’라는 말처럼, 먼저 목소리를 키우는 모습에서 굳이 저 역시 목소리를 키울 필요가 없을 것 같아서 바로 보험회사를 불러서 사고를 처리했습니다. 

이런 모습이 바로 피해자 탓하기 오류에 빠진 것입니다. 피해자를 탓함으로 인해 자기를 보호하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방식으로의 자기 보호는 피해자에게 더 큰 상처를 남기게 될 뿐입니다. 첫 번째 피해에 또 다른 가해를 범하는 것이 됩니다. 

자신은 무조건 옳고 상대방은 틀렸다는 생각을 자연스럽게 품는 우리는 아니었을까요? 따라서 늘 자신을 되돌아보면서 바른 판단으로 올바른 길을 갈 수 있어야 합니다. 

주님께서도 이 피해자 탓하기 오류에 빠진 당시 사람들에 의해 수난과 죽음을 맞이하신 것은 아닐까요? 

오늘은 ‘주님 수난 성지 주일’입니다. 주님께서 파스카 신비를 완성하시려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것을 기념하는 날로, 오늘부터 성주간이 시작됩니다. 그래서 성지 축복과 행렬을 거행하면서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을 미사 중에 기념하고, 또 미사 중 그리스도의 수난기를 통해 주님의 수난과 죽음을 깊이 묵상하게 합니다(코로나 19 예방을 위한 사회적 거리 두기로 미사를 신자들과 함께 할 수는 없지만). 

주님께서는 어떤 죄도 있을 수 없는 하느님이십니다. 주님께서 하신 일이라고는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전한 것, 하느님의 사랑이 얼마나 큰지를 알려주신 것, 놀라운 기적으로 구원의 표징을 보여 주신 것뿐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사람들은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예수님을 열렬히 환호하며 맞이했지만, 일주일도 채 되지 않아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라면서 적의를 표시하면서 예수님을 반대합니다. 죄 없으신 분을 향해 죄로 가득한 사람이 오히려 목소리를 키우며 “틀렸다”라고 피해자 탓하기를 하는 것입니다.

은돈 서른 닢에 자신을 팔아넘긴 제자, 자신을 모른다고 세 번이나 부인한 제자, 붙잡혀가자 뿔뿔이 흩어진 제자들, 거짓 증언을 하는 사람들,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외치는 군중들, 침을 뱉고 때리는 등 모욕을 주는 군사들, 심지어 큰 죄를 지어 십자가형을 당하면서도 예수님을 조롱하는 도둑 등등…. 얼마나 주님께서 외로우셨을까요? 

우리도 주님 탓을 많이 합니다. 자기 일이 풀리지 않는다고, 내 뜻대로 되지 않는다면서 주님 탓을 합니다. 또 주님을 외롭게 합니다.

 

인생의 참된 진리는 전혀 새로운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마음 깊은 곳에서 이미 모든 것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에크하르트 톨레). 

 

주님의 예루살렘 입성

 

한 번 더 생각하고, 한 번 더 이해하기.


신부라고 해서 인상이 다 좋은 것은 아닙니다. 하긴 저부터가 인상 좋다는 이야기를 잘 듣지 못합니다. 그런데 어떤 신부님의 인상은 해도 해도 너무할 정도로 좋지가 않았습니다. 본당 사목을 하고 있을 때 동네 깡패로 오해받을 정도였습니다. 본인의 이런 점을 알고는 있었지만 본래 바탕이 이러니 어떻게 하겠냐면서 포기하고 있었지요. 

그러던 어느 날, 본인이 잘 웃지 않아서 이런 오해를 받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자주 웃었습니다. 심지어 미사 중에도 미소를 띠면서 미사를 봉헌했습니다. 그 결과 어떻게 되었을까요? 

이 신부님은 투서를 받았다고 합니다. 글쎄 미사 중에 신자들을 향해 자주 비웃는다는 것이었지요. 신부님을 잘 아는 사람은 그렇지 않음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잘 모르는 사람에게 신부님의 웃는 모습이 비웃는 것처럼 보였던 것입니다. 

알고 모르고의 차이는 이런 오해를 만들 수도 있습니다. 어쩌면 이런 오해를 계속 만들어가며 사는 것은 아닐까요? 잘 알지도 못하면서 섣부르게 판단하는 그래서 누군가에게 큰 상처를 계속해서 남기는 우리입니다. 

한 번 더 생각하고, 한 번 더 이해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주님을 모르기에 십자가에 못 박았던 이스라엘 사람들의 전철을 또다시 반복해서는 안 됩니다.

 

오늘은 한식이며, 식목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