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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11월 28일 연중 제34주간 토요일

건들구리 2020. 11. 28. 10:58

복음 루카 21,34-36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34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여, 방탕과 만취와 일상의 근심으로 너희 마음이 물러지는 일이 없게 하여라. 그리고 그날이 너희를 덫처럼 갑자기 덮치지 않게 하여라. 35 그날은 온 땅 위에 사는 모든 사람에게 들이닥칠 것이다. 36 너희는 앞으로 일어날 이 모든 일에서 벗어나 사람의 아들 앞에 설 수 있는 힘을 지니도록 늘 깨어 기도하여라.”


언젠가 초등학교 동창들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것도 초등학교 2학년 때 같은 반 친구들입니다. 43년 만의 만남이었기에 무척이나 반가웠습니다(참고로 여자친구가 아니라, 모두 남자친구입니다). 그런데 이야기를 하다 보니 이상한 점을 하나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같은 반이었음은 분명한데, 기억하고 있는 것이 서로 다르다는 것입니다. 

“기억나니? 내가 너희 집에 놀러 갔었는데, 그때 네 어머니께서 아이스크림 ‘아이차’를 사주셨어.”

당시에 어머니께서 매우 편찮으셔서 친구를 데려오지 못하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이런 생각을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내가 이 친구를 데리고 집에 갔다고? 그럴 리가 없는데….’

저 역시 기억하고 있는 것을 이야기해 보았습니다. 이 친구들 역시 기억하지 못하는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습니다. 

정말로 기억나지 않는 것일까요? 아니면 기억하지 못하는 척일까요? 저의 경험을 보니, 기억나지 않는다는 것이 정답이라는 것입니다. 오랜 시간이 흐른 이유도 있겠지만, 별로 중요하다고 생각하고 있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종종 과거에 받은 상처로 힘들어하는 분을 만납니다. 그분들의 억울함은 자신이 이렇게 과거의 기억으로 지금까지 힘들어하는데 상대방은 그런 일이 있었던 것 자체를 기억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분명한 사실은 이 상대방이 모른 척하는 것이 아니라, 정말로 기억하지 못할 때가 많다는 것입니다. 

과거의 기억 때문에 힘들 수 있습니다. 그러나 상처를 준 사람으로 인해 문제가 해결되지는 않습니다. 나만이 해결할 수가 있습니다. 

오늘 복음은 연중 시기를 마무리하는 주님의 마지막 훈계 말씀입니다. 일상생활에서 거창한 죄로 여겨지지도 않고 별로 흠 없어 보이는 행위들이지만, 당신의 임박한 재림과 갑자기 닥치는 세상의 종말을 경계하는 마음을 흐리게 만드는 ‘방탕과 만취와 일상의 근심’을 조심하라고 하십니다. 그렇다면 이는 누가 해야 할까요? 내 이웃이 해야 할 것이 아닙니다. 또 그런 마음을 품지 않도록 하느님께서 하실 것도 아닙니다. 바로 ‘나’만이 가능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자유의지를 주셔서 우리 스스로 해야 할 것을 마련해 주셨습니다. 이는 당신이 하기 싫어서가 아니라, 우리를 너무나도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내가 할 수 있으며 당연히 해야 할 것을 남에게 책임을 지우고 남 탓을 하는 데 시간과 힘을 쏟고 있는 것이 아닐까요? 

사랑으로 많은 것을 주신 하느님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것을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그래서 주님 말씀처럼 늘 깨어 기도해야 합니다.


꿈을 향해 자신있게 한 걸음 내디딘다면, 자신이 그린 삶을 살기 위해 한 가지 시도를 한다면 평범한 시간들 속에서 예기치 못한 성공을 만날 것이다(헨리 데이비드 소로).

 

인천교구 성지, 제물진두 순교 성지 

진정한 배려


2011년, UN 평화의 날 행사에서 세계적으로 유명한 가수 스티비 원더와 피겨여왕 김연아 선수가 나란히 앉아 있었습니다. 그런데 앞이 보이지 않는 스티비 원더가 발언해야 할 때, 그의 마이크가 꺼져 있었던 것입니다. 마이크의 소리 스위치를 찾지 못해서 당황하고 있을 때, 옆에 있었던 김연아 선수가 그의 마이크 스위치를 켜주었다고 합니다. 

여기까지는 이상한 내용도 아니고, ‘그럴 수도 있다.’라고 말할 수 있는 수준입니다. 그런데 김연아 선수가 스위치를 켜기 전에 스티비 원더 뒤에 있던 그의 비서에게 ‘제가 이분을 도와드려도 될까요?’라고 먼저 양해를 구했다는 것입니다. 자신의 선의이지만 혹시 불편한 마음을 가질 수 있을 수도 있기 때문이지요. 

진정으로 남을 배려하는 것은 상대의 마음까지도 생각할 수 있을 때 가능한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상대의 마음은 전혀 생각하지도 않으면서, “나는 충분히 배려했어.”라고 외치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요? 진짜 배려를 실천할 수 있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더 살기 좋은 세상이 됩니다. 

 

인천교구 성지, 제물진두 순교 성지 성당의 십자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