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 마태 13,54-58
그때에 54 예수님께서 고향에 가시어 회당에서 사람들을 가르치셨다. 그러자 그들은 놀라서 이렇게 말하였다. “저 사람이 어디서 저런 지혜와 기적의 힘을 얻었을까? 55 저 사람은 목수의 아들이 아닌가? 그의 어머니는 마리아라고 하지 않나? 그리고 그의 형제들은 야고보, 요셉, 시몬, 유다가 아닌가? 56 그의 누이들도 모두 우리와 함께 살고 있지 않는가? 그런데 저 사람이 어디서 저 모든 것을 얻었지?” 57 그러면서 그들은 그분을 못마땅하게 여겼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예언자는 어디에서나 존경받지만 고향과 집안에서만은 존경받지 못한다.” 58 그리고 그들이 믿지 않으므로 그곳에서는 기적을 많이 일으키지 않으셨다.
우리는 몇 가지의 표정을 지을 수 있을까요? 연구자마다 견해가 다르기는 하지만, 최하 4,000가지에서 최고 1만 가지의 표정을 지을 수 있다고 합니다. 아주 많은 표정을 가지고 있는 우리라는 것이지요. 실제로 우리 몸 전체의 근육 수와 비교해 얼굴의 표정에 관여하는 근육은 40가지가 넘는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런 다양한 표정을 지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를 통해 한 가지를 생각할 수 있게 합니다. ‘지금 저 사람의 표정은 이런 내용이다.’라고 단정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아무런 표정을 짓지 않는다고 ‘화났다.’라고 판단할 수 없으며, 지금 웃고 있다고 기쁜 상태라고 말할 수도 없습니다. 실제로 어이없어서 웃음이 나오는 경우도 있지 않습니까?
남을 판단한다는 것, 특히 겉모습과 말 자체를 두고 판단했다가는 잘못된 오류에 빠지기 쉽습니다. 실제로 세계의 역사 안에 그런 오류의 죄에 빠졌던 적이 있습니다. 머리의 형태, 얼굴 모양, 머리카락 등을 통해 죄의 유무를 판단했던 적이 있습니다. 즉, ‘죄인은 ~ 이러하다.’라는 잘못된 판단 오류를 간직하고 있었던 것이지요. 하긴 예수님도 이 잘못된 프레임에 갇혀서 십자가형을 당하셨습니다.
오늘 복음의 장면 역시 잘못된 프레임에 갇혀서 주님을 잘못 판단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고향을 찾아오신 예수님을 향해 사람들은 쑥덕대며 자신의 판단을 뱉어냅니다. 그리고 여기서 더 나아가서 성경은 그들이 그분을 못마땅하게 여겼다고 전해줍니다. 주님께서 무엇을 잘못하셨을까요? 그들에게 아픔과 상처를 주었을까요? 아닙니다. 그보다 구원의 길로 이끌어 주셨고, 하느님의 사랑을 기적이라는 놀라운 표징으로 보여주셨습니다. 그런데도 못마땅하게 여깁니다. 잘못된 판단의 오류에 빠진 것입니다.
그렇다면 지금은 없을까요? 지금도 여전히 많은 판단의 오류에서 벗어나지 못해서 남을 잘못된 모습으로 단죄하는 경우가 너무나 많습니다.
이 잘못된 판단이 자기 하나에서 그치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잘못 판단했던 고향 사람들이 얻은 것은 과연 무엇이었을까요?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들이 믿지 않으므로 그곳에서는 기적을 많이 일으키지 않으셨다.”(마태 13,58)
우리의 판단을 생각해보았으면 합니다. 과연 제대로 된 판단일까요? 남에 대한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것 자체가 주님을 판단하는 커다란 불경으로 옮아갈 수 있음을 잊지 않았으면 합니다.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는 마음은 자신의 겸손을 통해서만 가능합니다.
사람은 자기가 마음 먹은 만큼 행복하다(에이브러햄 링컨).
성 이냐시오 데 로욜라 사제
내 삶을 변화시키고, 낡은 타성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법정 스님의 ‘스스로 행복하라’라는 책을 읽었습니다. 이 책에서 인용된 서산 대사님의 글을 적어 봅니다.
“출가하여 수행자가 되는 것이 어찌 작은 일이겠는가, 편함과 한가함을 구해서가 아니고, 따뜻이 입고 배불리 먹으려는 것도 아니며, 명예와 재물을 구해서도 아니다. 생과 사의 괴로움에서 벗어나자는 것이며, 부처님의 지혜를 이으려는 것이고, 끝없는 중생을 건지려는 것이다.”
그러면서 이것이 출가 정신이고, 이 각오, 이 정신을 늘 지녀야 한다고 법정 스님은 말씀하십니다.
사제가 되었을 때의 첫 마음을 다시금 생각하게 하는 말씀이었습니다. 어느 순간 타성에 젖어 편하고 쉬운 것만을 쫓았던 저를 향한 스님의 일성 같았습니다.
내 삶을 변화시키고, 낡은 타성에서 벗어나야 할 것입니다. 이는 성직자, 수도자에게만 해당하는 말이 아닙니다. 이 세상을 살아가는 모든 이에게 해당하는 말로, 그래야 새로운 세상인 하느님 나라를 맞이하게 됩니다.
스페인의 로욜라의 이냐시오 성당 제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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