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빠다킹 신부

2020년 5월 4일 부활 제4주간 월요일

복음 요한 10,11-18

그때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11 “나는 착한 목자다. 착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내놓는다. 12 삯꾼은 목자가 아니고 양도 자기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이리가 오는 것을 보면 양들을 버리고 달아난다. 그러면 이리는 양들을 물어 가고 양 떼를 흩어 버린다. 13 그는 삯꾼이어서 양들에게 관심이 없기 때문이다. 
14 나는 착한 목자다. 나는 내 양들을 알고 내 양들은 나를 안다. 15 이는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과 같다. 나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다. 16 그러나 나에게는 이 우리 안에 들지 않은 양들도 있다. 나는 그들도 데려와야 한다. 그들도 내 목소리를 알아듣고 마침내 한 목자 아래 한 양 떼가 될 것이다.
17 아버지께서는 내가 목숨을 내놓기 때문에 나를 사랑하신다. 그렇게 하여 나는 목숨을 다시 얻는다. 18 아무도 나에게서 목숨을 빼앗지 못한다. 내가 스스로 그것을 내놓는 것이다. 나는 목숨을 내놓을 권한도 있고 그것을 다시 얻을 권한도 있다. 이것이 내가 내 아버지에게서 받은 명령이다.”


‘가해자 지목 문화’가 너무 팽배한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물론 잘못을 한 가해자를 향한 비판은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가해자로 모든 이유가 자신과 다른 견해를 갖고 있다고, 또 자신이 이해하기 힘든 행동이라는 것에 있다면 문제가 있습니다. 실제로 이렇게 가해자로 지목되어서 피해를 본 경우가 상당하다고 합니다. 가해자로 지목되었지만, 피해자가 되는 것이지요. 

어떤 분은 실수로 문장을 잘못 썼다고 합니다. 이 문장 하나에 꼬투리가 잡혀서 온갖 비난을 받게 된 것이지요. 그런데 댓글을 보고서 참으로 깜짝 놀랐습니다. 댓글에는 눈썹이 어떻다느니, 말할 때 입술이 어떻게 움직인다든지, 목소리가 어떻다든지, 머리 모양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든지……. 등의 말을 하면서 자신의 존재 자체가 잘못이라는 듯이 말을 하더라는 것입니다. 

무조건 거부하는 가운데 상처는 더욱더 커질 수밖에 없습니다. 본인은 나중에 ‘아니면 말고’라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그 주인공의 상처는 스스로 극복하기 힘들 정도가 됩니다. 무조건 비판하는 폭력성은 점점 더 커지면서 비극적인 결말을 가져오기도 합니다. 

부정적인 생각을 갖고서 무조건 반대하는 모습에서는 절대로 올바른 길로 나아갈 수 없습니다. 이들은 진리 앞에서도 부정하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무조건 나는 맞고 너는 틀리다는 생각의 틀에서 벗어나지 않기 때문이지요. 

착한 목자와 삯꾼에 대해 이야기를 하십니다. 삯꾼은 위험에 처하면 양들을 버려두고 달아납니다. 자신의 안녕만 생각하기에 양들이 공격을 받든 말든 마음 쓰지 않습니다. 그러나 착한 목자는 그렇지 않습니다. 자신의 말과 행동에 책임을 지면서 양들을 보호하기 위해 자신의 생명까지 내어놓습니다. 그래서 어렵고 힘든 상황에 부닥치게 되면 누가 삯꾼인지, 착한 목자인지가 분명해집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의 죽음으로 자신의 생명을 양들인 우리를 위해 내어놓으셨습니다. 그만큼 우리에 대한 사랑이 컸습니다. 결국, 삯꾼과 착한 목자의 구별은 사랑의 여부에 결정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세상 안에서 이 삯꾼의 모습으로 살아가는 사람이 많은 것이 아닐까요? 사랑 없이 행하는 말과 행동이 커다란 폭력으로 작용해서 다른 이를 절망의 구렁텅이로 밀어 넣고 있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우리는 착한 목자인 주님을 따르는 착한 양입니다. 이 양들을 위험으로 몰아넣는 못된 삯꾼이 되어서는 절대로 안 됩니다. 주님을 따르는 착한 양은 주님께 대한 굳은 믿음을 가지고 사랑을 실천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야 착한 목자이신 주님과 언제나 함께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은 고통으로 가득하지만, 그것을 극복하는 사람들로도 가득하다(헬렌 켈러). 

착한 목자. 

가지치기


가지치기하는 정원사를 보면서, 나무의 처지를 생각해봅니다. 

‘나는 자유롭게 성장하고 싶은데 왜 고통을 주는 거야?’

가지를 치는 고통에 정원사가 원하는 모습으로 살라는 것이 말도 안 된다면서 화를 낼 것만 같습니다. 그러나 가지치기를 하지 않으면 어떻게 될까요? 

보기 싫은 모습이 되는 것뿐만 아니라, 잔가지가 많아져서 햇빛과 영양분이 고르게 공급될 수가 없지요. 나무의 상태가 점점 더 나빠지게 됩니다. 그래서 가지치기는 인간의 눈을 만족시키기 위한 것을 넘어 나무를 위해서도 반드시 필요합니다. 

우리 마음도 그렇지 않을까 싶습니다. 모든 것을 다 담고 있으면 행복할까요? 때로는 쓸데없는 마음은 과감하게 잘라 버려야 합니다. 나의 성장을 막는 마음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미움, 욕심, 부정적 판단, 이기적 마음 등등……. 잘라야 할 것이 너무나 많습니다. 

이런 잔가지들을 쳐내야만 진정으로 잘 성장할 수 있게 됩니다. 이 모습을 바라시는 주님께서는 그래서 이 땅에 오셔서 우리의 잘못된 마음을 치셨습니다. 

착한 목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