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 루카 19,1-10
그때에 1 예수님께서 예리코에 들어가시어 거리를 지나가고 계셨다. 2 마침 거기에 자캐오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는 세관장이고 또 부자였다.
3 그는 예수님께서 어떠한 분이신지 보려고 애썼지만 군중에 가려 볼 수가 없었다. 키가 작았기 때문이다.
4 그래서 앞질러 달려가 돌무화과나무로 올라갔다. 그곳을 지나시는 예수님을 보려는 것이었다.
5 예수님께서 거기에 이르러 위를 쳐다보시며 그에게 이르셨다. “자캐오야, 얼른 내려오너라. 오늘은 내가 네 집에 머물러야 하겠다.”
6 자캐오는 얼른 내려와 예수님을 기쁘게 맞아들였다. 7 그것을 보고 사람들은 모두 “저이가 죄인의 집에 들어가 묵는군.” 하고 투덜거렸다.
8 그러나 자캐오는 일어서서 주님께 말하였다. “보십시오, 주님! 제 재산의 반을 가난한 이들에게 주겠습니다. 그리고 제가 다른 사람 것을 횡령하였다면 네 곱절로 갚겠습니다.”
9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오늘 이 집에 구원이 내렸다.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이기 때문이다. 10 사람의 아들은 잃은 이들을 찾아 구원하러 왔다.”
어떤 학생을 만나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눌 수가 있었습니다. 이 학생은 전에 제 강의를 들었는데 너무나 감명 깊었다고 말하더군요. 특히 신학교 들어가서 본 첫 시험에서 낙제 점수를 맞아 성소에 대해 고민을 했다는 말에 인상적이었다고 합니다.
당시에는 진짜로 진로를 바꾸는 것이 낫지 않을까 하는 고민을 하고 있을 때였습니다. 처음 공부하는 철학과 신학이 저에게 전혀 맞지 않는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1학년 때부터 이렇게 공부하기 힘든데, 이 힘든 것을 자그마치 7년을 더 해야 한다는 사실이 끔찍했었습니다.
이렇게 힘들었던 순간을 말했을 뿐인데, 이 순간이 다른 누군가에게는 위로가 될 수 있었나 봅니다. 성공의 순간을 듣는 것보다 고통을 이겨내는 순간을 듣는 것이 더 큰 힘이 될 수 있다는 심리학자의 말이 생각났습니다.
겪고 싶지 않은 고통과 시련의 순간에 대해 다시금 생각하게 됩니다. 이 순간도 다른 누군가에게는 위로가 될 수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 어떤 것도 부정할 것이 아니었습니다. 주님께서는 그 어떤 시간도 쓸모없이 만들지 않으십니다.
세관장이면서 부자였던 자캐오와 예수님의 만남은 참으로 감동적입니다. 사실 이 둘의 만남을 당시의 종교지도자들은 원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자캐오의 집에 가는 것을 보고는 “저이가 죄인의 집에 들어가 묵는군.”하고 투덜거렸습니다. 실제로 세리는 창녀와 더불어 완전히 타락한 죄인의 본보기였습니다. 이 죄인을 만나는 것도 엄청난 시간 낭비를 한 것인데, 그의 집에까지 들어간다는 것을 어떻게 받아들일 수 있겠습니까? 쓸모없는 행동을 하고 있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자캐오는 부자가 하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어렵기는 하지만 불가능한 일은 아님을 알려줍니다. 세관장이라는 지위에 있는 사람이 돌무화과나무로 올라가는 것은 흔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예수님을 보기 위해 세상의 모든 어리석은 죄를 안고 있는 땅 위로 올라가야만 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재산을 하느님을 위해 내어놓습니다.
“주님! 제 재산의 반을 가난한 이들에게 주겠습니다. 그리고 제가 다른 사람 것을 횡령하였다면 네 곱절로 갚겠습니다.”
그의 모든 재산을 내어놓은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이 모습을 쓸모없는 행동을 하고 있다고 말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재산은 그의 구원을 위해 쓰이게 되었습니다. 영원한 생명을 얻는 데 걸림돌이 될 그의 재산이 오히려 영원한 생명을 얻는 도구가 되었습니다.
어떤 시간도 쓸모없지 않습니다. 특히 주님과 함께 하는 시간, 주님의 뜻을 따르는 시간은 내게 영원한 생명을 가져다주기에 가장 의미 있습니다.
돈은 숫자이고, 숫자에는 끝이 없다. 만약 행복하기 위해 돈이 필요하다면 당신은 끝없이 찾아야 할 것이다(밥 말리).
대전교구 순교사적지, 합덕성당
어떻게 칭찬할 것인가?
미국의 심리학자들은 다음과 같은 실험을 했습니다.
모두가 답을 맞힌 간단한 테스트 후에, 첫 번째 그룹 아이들에게는 “넌 정말 똑똑해!”라고 말해주었고, 두 번째 그룹 아이들에게는 “공부를 정말 열심히 했구나. 덕분에 테스트에 합격했어.”라고 말해주었습니다.
그다음 더 어려운 테스트에 참여하도록 했습니다. 그러자 첫 번째 그룹 아이들은 두려워했고, 자신이 똑똑하다고 느끼지 못했습니다. 막연한 개념인 ‘똑똑하다’라는 칭찬을 들었기 때문에 자신에 대한 기대가 부담스러워 용기를 잃을 것입니다.
하지만 두 번째 그룹 아이들은 끈기 있게 노력했습니다. 이들에게는 추상적인 칭찬이 아니라, ‘정말 열심히 공부했다’라는 구체적인 말을 사용해 칭찬했기 때문입니다. 이들은 실제로 테스트에도 통과했습니다.
칭찬의 중요성을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막연하고 추상적인 칭찬은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구체적인 말을 사용하는 칭찬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스스로 알지 못했던 잠재력까지 나올 수가 있습니다.
스스로에 대한 칭찬도 마찬가지입니다. 구체적인 이유를 달 수 있어야 합니다.
대전교구 순교사적지, 합덕성당 순교자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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